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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신’이라는 미시 세계

기계식 시계에서 얇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컴플리케이션이다. ‘두께’라는 부품을 한계까지 깎아내는 울트라-신의 미시 세계.


세계에서 가장 얇은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COSC
세계에서 가장 얇은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COSC

손목시계는 얇을수록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진다. 그뿐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기 때문에 두께는 늘 고급 시계의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하지만 충분히 슬림한 무브먼트를 더 얇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얇게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성과 안정성을 함께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트라-신 워치는 종종 컴플리케이션으로 분류된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기술일지도 모른다. 기능을 더하는 것은 공간만 있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두께를 줄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순간이 반드시 온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어려운 건 사람이나 시계나 매한가지다.


두께 1.38mm의 칼리버 145를 탑재한 예거 르쿨트르의 포켓 워치
두께 1.38mm의 칼리버 145를 탑재한 예거 르쿨트르의 포켓 워치


시계, 포켓 속으로 들어가다

얇은 시계에 대한 워치메이커의 도전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지금은 너무 두껍다고 생각하는 포켓 워치 역시 시계를 좀 더 얇게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프랑스 최고의 워치메이커였던 장-앙투안 레핀은 18세기 중반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얇은 포켓 워치를 만들었다. 그 전의 기계식 시계는 주머니에 넣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는 얘기다. 레핀은 무브먼트의 상단 플레이트를 모두 제거하고 단일 플레이트에 개별 콕을 장착했다. 또 기어 트레인을 독립 브리지로 고정하고, 플로팅 배럴을 발명해 퓨즈와 체인을 대체했다. 레핀의 설계는 그야말로 기계식 시계의 변곡점이었고, 이후 제자인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를 비롯한 많은 워치메이커에게 영감을 주면서 본격적인 포켓 워치 시대를 열었다.


물론 포켓 워치 시대에도 더 얇게 만들려는 워치메이커들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예거와 르쿨트르도 그런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1903년 프랑스 파리의 워치메이커 에드몽 예거는 스위스 매뉴팩처에 자신이 디자인한 울트라-신 무브먼트를 생산하도록 요청했다. 당시 자크-데이비드 르쿨트르가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1907년 칼리버 145가 탄생했고, 이는 훗날 예거 르쿨트르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쿠토(칼을 뜻하는 프랑스어)’라는 별명을 지닌 칼리버 145는 두께가 1.38mm에 불과했고 당시 예거 르쿨트르의 포켓 워치에 장착되어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예거 르쿨트르의 울트라-신 기술과 헤리티지는 오늘날 메종의 마스터 울트라 씬 컬렉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 창립자 앙투안 르쿨트르
예거 르쿨트르 창립자 앙투안 르쿨트르

피아제가 1957년 제작한 두께 2mm의 칼리버 9P
피아제가 1957년 제작한 두께 2mm의 칼리버 9P

울트라-신 무브먼트의 선구자들

크기가 작아진 만큼 손목시계 시대에는 슬림한 무브먼트를 만드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천재적인 워치메이커 덕분에 손목시계용 울트라-신 무브먼트는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완성되었다. 워치메이커 앙리 루이 피게는 1925년 지름 20mm, 두께 1.75mm의 초박형 무브먼트 칼리버 99를 개발했는데, 이 무브먼트는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803, 피아제의 칼리버 9P와 함께 20세기 울트라-신 워치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계 애호가라면 눈치챘겠지만 앙리 루이 피게는 프레드릭 피게의 아버지다. 칼리버 99는 훗날 일부 설계를 변경해 프레드릭 피게의 칼리버 21로 발전했고, 블랑팡의 울트라-신 워치에 탑재되었다. 그뿐 아니라 파텍필립의 칼리버 175를 비롯해 여러 브랜드의 울트라-신 엔진으로 사용되었다.


칼리버 99의 기록을 깬 것은 오데마 피게와 바쉐론 콘스탄틴을 위해 예거 르쿨트르가 1944년 개발한 칼리버 803이다. 두께 1.73mm로 칼리버 99의 1.75mm보다 더 얇은 수치이며, 이 무브먼트는 이후 칼리버 839, 칼리버 849로 이어지면서 예거 르쿨트르의 울트라-신 엔진을 담당하게 된다. 사실 칼리버 803의 베이스 무브먼트인 칼리버 ML의 설계를 맡은 사람 역시 앙리 루이 피게이기 때문에 이 또한 칼리버 99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프레드릭 피게의 칼리버 21은 100년 넘게 생산된 울트라-신 무브먼트의 출발점이자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울트라-신 워치의 역사에서는 피아제를 빼놓을 수 없다. 피아제는 1957년 두께 2mm의 칼리버 9P를 발표하면서 울트라-신 무브먼트 제조사 반열에 올라섰다. 이어서 1960년에는 마이크로 로터를 장착한 두께 2.3mm의 칼리버 12P를 선보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오토매틱 무브먼트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오랫동안 피아제는 25개의 울트라-신 무브먼트를 개발할 만큼 이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쌓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워치인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투르비용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워치인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투르비용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워치인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투르비용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워치인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투르비용

뒤바뀐 세계신기록

시계업계에서는 매뉴얼 와인딩 기준으로 2mm 내외, 셀프 와인딩 기준으로 3mm 내외의 무브먼트를 일반적으로 울트라-신 무브먼트라고 부른다. 정확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이 기준을 충족시키는 시계는 사실상 많지 않다. 부품이 작고 얇을수록 생산·가공·조립 난도는 급격하게 높아진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 얇게 만들면 두께를 타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몇몇 브랜드는 한계에 도전하면서 기계식 시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의 여정에서 시작되었다. 불가리는 이 컬렉션으로 그동안 미닛프, 퍼페추얼 캘린더 등 대부분의 컴플리케이션에서 가장 가져갔다. 그럼에도 전 분야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얇은 만만치 않았다.


먼저 2018년 피아제가 두께 2mm의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워치를 선보였고, 2020년 이를 상용화하면서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 피아제는 케이스와 무브먼트를 통합 설계하고 0.2mm 두께의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사용해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분야별 울트라-신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운 불가리는 2022년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워치로 이 기록을 넘어섰다. 이 시계는 시와 분을 서로 다른 다이얼에서 표시하는 레귤레이터 방식을 적용했고, 크라운을 생략해 시간 조정과 와인딩을 2개의 휠로 조작하도록 했다. 그 결과 두께 1.8mm의 놀라운 울트라-신 워치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같은 해 리차드 밀에 의해 곧바로 깨졌다. RM UP-01 페라리는 1.75mm의 케이스 두께에 5,000g 이상의 중력가속도를 견디는 내구성까지 확보했다. 무브먼트의 두께는 1.18mm, 전체 중량은 단 2.82g에 지나지 않는다. 리차드 밀은 울트라 플랫 이스케이프먼트, 가변 관성 밸런스 휠, 엑스트라 플랫 배럴 등을 새롭게 개발해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2024년 다시 새로운 세계신기록이 수립되었다. 불가리가 새로운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 워치를 공개하면서 타이틀을 되찾아온 것이다. 이번 신제품의 두께는 1.7mm에 불과하며, 놀랍게도 COSC 인증까지 확보했다.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크로노미터 워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 이 기록을 다시 넘어서겠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을 듯하다. 한편 피아제도 올해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투르비용 워치로 세계에서 가장 얇은 투르비용 워치 신기록을 세웠다. 기존 모델의 90%가량을 다시 설계했으며, 코발트 합금 소재 케이스에 플라잉 투르비용을 세라믹 볼 베어링으로 고정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도 전면부 0.2mm, 후면부 0.16mm에 불과하다. 울트라-신 분야에서 유독 경쟁이 치열한 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싸우는 사람들은 괴롭겠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흥미진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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