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라스와의 인터뷰
- bhyeom
-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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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라스는 파텍 필립의 세월을 이어받아 덴마크에서 독자적 길을 걷는 워치메이커다. 그의 첫 시계 30CP는 한 점으로도 오랜 시계 제작 숙련의 궤적을 증명한다.
비아니 할터(Vianney Halter), 필립 듀포(Philippe Dufour)가 발굴한 인재 크리스티안 라스는 약 10년 동안 파텍 필립 박물관의 복원가로 일하다 2018년 덴마크에 자신의 아틀리에를 열었다. 30CP는 그가 아틀리에를 연 후 완성한 첫 작품이자 유일한 시계지만, 200년에 가까운 파텍 필립의 역사만큼 깊은 세월이 흐른 듯한 느낌을 준다. <GMT KOREA> 팀은 운이 좋게도 크리스티안 라스의 첫 여정을 함께한 일본 수집가 이케다 다케시를 오사카에서 만나, 그가 맞춤 주문한 30CP 시계를 함께 언박싱할 기회를 얻었다. 크리스티안 라스는 스위스 밖, 자신의 고향인 덴마크에서 독자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며 시계 제작을 이어가고 있다. 원활한 공급망을 확보하는 일로 고군분투하지만, 시계를 대하는 그의 마음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곧다. 도그마 95 영화 운동처럼 자신만의 규율을 철저히 확립하고 워치메이커를 직접 양성하며 시계 제작은 물론 자신만의 메종 철학을 구축해 가는 그는 어떠한 사상을 지니고 있을까? 그리고 그의 세계관이 깃든 시계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시계 제작 여정이 담긴 첫 시계와 함께 인터뷰를 공개한다.



30CP
지름 38mm
케이스 옐로 골드, 화이트 골드, 로즈 골드, 30m 방수
무브먼트 기계식 수동 30CP 무브먼트, 42시간의 파워 리저브
다이얼 저먼 실버
기능 시, 분, 초
스트랩 핀버클이 달린 가죽
처음으로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워치메이킹에 깊이 빠져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기계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아버지는 항공기 정비사 출신 엔지니어였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타자기, 하이파이 장비, 자전거, 모페드 등을 함께 고치곤 했다. 학교에서도 수학, 물리, 역사처럼 이론과 구조를 이해하는 과목에 강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공학 분야였던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휴대전화와 GSM 네트워크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학업 중 노키아와 에릭슨이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진로에 고민이 생겼고, 그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조지 다니엘스(George Daniels)의 저서 <워치메이킹(Watchmaking)>을 발견했다. 고급 기계공학, 깊은 이론, 아름다운 디자인이 완벽히 결합된 세계였고, ‘언젠가 나도 이런 시계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이후 운 좋게 덴마크의 왕실 시계 제작자 쇠렌 안데르센(Søren Andersen)의 견습생 자리를 얻어 4년간 귀중한 시계 복원 및 워치메이킹의 기초 기술까지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본인의 브랜드를 창립하게 되었나?
견습 기간을 마친 뒤 스위스로 건너가 스팀펑크 미학과 혁신적 컴플리케이션으로 현대 독립 시계 제작의 흐름을 바꾼 전설적인 워치메이커 비아니 할터와 함께 일할 기회를 얻었다. 쿼터 리피터와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갖춘 포켓 워치 기반의 프로젝트를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의 산골 마을 아틀리에는 온전히 워치메이킹만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비아니의 작업은 그 당시에도 놀라웠고, 시대를 한참 앞서 있었다. 그제야 그의 작업이 현대 워치메이킹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한 나는 그곳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현대 독립 시계 제작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훗날 나의 아내가 된 훌륭한 인그레이버 하넬로어도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여러 AHCI 멤버를 찾아다녔고, 특히 필립 듀포를 만나 그에게서 배운 피니싱 기술과 발레 드 주의 고전적 워치메이킹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후 나는 파텍 필립 박물관의 복원 책임자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왕실 시계 제작자 스벤 앤더슨(Svend Andersen)에게서 배운 전통 가공 기술과 스위스 하이엔드 워치메이킹 경험이 내게 큰 문을 열어준 것이다. 파텍 필립 박물관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백과사전과 같고, 필립 스턴 회장 덕분에 누구나 세계 최고의 시계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장소다. 그곳에서 10년 동안 축적한 지식이 지금 내 시계의 모든 기반이 되었다. 그 방대한 컬렉션을 자세히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스턴 회장에게 감사하다.
시그니처 모델인 30CP는 어떻게 탄생했나?
덴마크로 돌아온 뒤 한 컬렉터가 심플한 스리 핸즈 시계를 의뢰했는데, 디자인까지 전적으로 내게 맡겼다. 나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와 북유럽 디자인 전통을 반영한 시계를 만들고 싶었다. 조화로운 균형과 여백이 살아 있는 무브먼트 디자인을 지향했다. 먼저 수십 년간의 복원 과정에서 보아온 고전 시계처럼 깨끗한 설계를 실현하기 위해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고정하는 로킹 플레이트를 숨겨 전체적인 균형을 해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우르반 위르겐센과 자크-프레데리크 우리에(Jacques-Frederic Houriet)의 오버레이드 밸런스 브리지를 연구해 여러 시도를 한 끝에 30CP의 스틸 밸런스 브리지를 완성했다. 이후 남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조정 가능한 헤어스프링 브리지를 고안했다. 이 브리지는 내가 복원했던 브레게의 마린 크로노미터에서 영감받았다. 브레게는 매우 흥미로운 형태의 헤어스프링 조정 장치를 사용했는데, 그 구조를 본떴다. 30CP에 비슷한 방식을 적용하려 했지만, 너무 작아서 구 형태의 조정 방식을 고안해 ‘루비 볼 헤어스프링 어저스터’라는 독창적 구조로 완성했다. 케이스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파텍 필립 박물관에서 보아온 수많은 빈티지 케이스는 현대 시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수려한 곡선과 디테일을 갖추었다. 오늘날의 케이스는 생산 효율 때문에 하나의 블록을 밀링해 옆면이 단순하고 케이스 나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러한 방식보다는 1940~1950년대에도 볼 법한 케이스 구조를 되살리고자 했다. 나사 구조를 없애 제작 난도는 높지만, 그만큼 요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케이스가 탄생했다.
덴마크에서 파인 워치메이킹을 이어가는 데 어떤 장점과 어려움이 있나?
덴마크에서 시계 제작을 이어가는 것은 늘 제약과 자유가 공존하는 과정이다. 스위스처럼 공급망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많은 요소를 직접 만들어야 하고, 숙련된 워치메이커를 찾기 어려워 직접 양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워크숍에서 실현 가능한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우리가 워치메이킹에 기여할 수 있는 본질적인 가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도그마 95 영화 운동이 불필요한 요소를 철저히 배제해 영화의 순수성에 집중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돌아보면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도전과 압박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과와 30CP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이자 인그레이버인 하넬로어 라스는 시계 작업에 어떤 의미를 더하나?
비아니 할터의 공방에서 만난 나의 아내 하넬로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하나우 드로잉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 전 진 슈페치알울렌(Sinn Spezialuhren)에서 워치메이커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미니어처 및 릴리프 인그레이빙을 전문으로 하게 된 조각가다. 그는 디테일을 보는 눈이 탁월해 우리 디자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브먼트와 다이얼은 그의 손끝에서 완성도를 갖추며, 최근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작품성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창작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
무엇보다 복원 과정에서 접한 역사적 시계들에서 큰 영감을 얻는다. 또 고전 건축물의 구조와 비례는 케이스 디자인에, 자연은 형태적 아이디어에 자주 연결되곤 한다. 어느 날 자연을 스케치하던 중 작은 새싹이 양쪽으로 잎 두 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장면이 30CP의 밸런스 브리지 디자인의 시작이 되었다.
최근 일본의 독립 시계 컬렉터 이케다 다케시와 오사카에서 30CP 언박싱을 진행했다. 그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시계를 만들며 전 세계의 훌륭한 컬렉터들을 만났고, 그 인연은 종종 깊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이케다 다케시와 처음 만난 것은 도쿄에서였다. 팬데믹 기간 셀만(Shellman) 워치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러 갔을 때였다. 당시 첫 시계를 막 완성한 시점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 그의 깊은 열정과 식견을 느낄 수 있었고, 그는 로즈 골드 30CP(로마숫자 다이얼 커스터마이즈)를 주문했다. 이후 몇 년간 SNS로 소통했다. 그는 시계 제작에 충분한 시간을 주며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완성 후 일본에서 직접 전달하려 했지만 미국 관세 변화로 방문이 무산되었고, 다음 일본 방문 때 꼭 다시 만나길 고대하고 있다. 우리 작업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미래까지 함께해 줄 컬렉터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워치메이커로서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가?
워치메이킹은 내 인생의 ‘마법의 양탄자’ 같다. 세계를 여행하게 했고,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게 했으며, 삶의 목적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꿈을 따르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 진심이 나의 시계와 아내의 작업을 통해 드러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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