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를 세계 무대로 올린 한 병의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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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나파 밸리는 세계 최고가 와인이 생산되는 대표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미국 컬트 와인은 보르도 그랑 크뤼와 경쟁하거나 그 이상 가격에 거래되며 글로벌 컬렉터 시장에서도 안정적인 수요층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 유럽의 전통 와인이 절대적 기준으로 여겨지던 고급 와인 시장에서 미국 프리미엄 와인 역시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미국 와인은 프랑스 와인과 같은 기준에서 평가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인식을 뒤집은 사건이 바로 1976년 파리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 이른바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다.
1976년 5월 24일, 파리 인터컨티넨탈 호텔. 스택스 립 와인 셀러(Stag’s Leap Wine Cellars)의 1973년산 S. L. V. 카베르네 소비뇽(S. L. V. Cabernet Sauvignon)이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 브리옹을 앞지르며 1위를 차지했다. 심사위원들은 생산자를 모르는 상태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결과가 발표된 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프랑스 와인 잡지 편집장 오데트 칸(Odette Kahn)은 자신의 점수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월스트리트 저널>의 와인 칼럼니스트 바버라 엔스러드(Barbara Ensrud)는 이 사건을 ‘와인 세계를 뒤흔든 한 발의 총성’에 비유했다. 1973년산 S. L. V. 카베르네 소비뇽은 1996년 워싱턴 D. C. 스미스소니언 국립 미국사 박물관에 소장되었고, 2013년 ‘미국을 만든 역사적 유물(Objects That Made America)’로도 선정되었다. 한 병의 와인이 문화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된 것이다.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테루아와 전설스택스 립 지역(Stags Leap District)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진 나파 밸리에 위치한다. 나파 밸리 동쪽에 자리한 이곳의 동쪽에는 ‘팰리세이즈(Palisades)’라 불리는 절벽이 솟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냥꾼에게 쫓기던 수사슴(stag)이 이 절벽을 뛰어넘어(leap) 도망쳤다고 전해지며, 이 이야기에서 지역명이 유래했다.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라벨에도 절벽 위에 선 수사슴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이 전설을 표현한 이미지다. 낮에는 절벽이 태양열을 반사해 포도를 충분히 익히고, 밤에는 태평양과 연결된 샌프란시스코만에서 유입되는 서늘한 해양성 공기가 계곡을 따라 흘러 들어와 큰 일교차를 만든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카베르네 소비뇽에 단단한 구조와 실키한 질감을 준다. 스택스 립은 지질과 기후, 그리고 전설이 함께 만든 나파 밸리의 독특한 테루아를 보여주는 구역이다.
2개의 포도밭, 하나의 철학바로 이 땅에서 1970년 워런 위니아스키(Warren Winiarski)는 스택스 립 와인 셀러를 세운다. 이탈리아에서 와인 문화를 경험한 그는 196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그리고 1970년 복숭아와 체리, 호두 등을 재배하던 부지를 매입해 S. L. V.(Stag’s Leap Vineyard)라 이름 붙이고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식재했다. 당시만 해도 나파 밸리는 세계적 기준의 와인 산지로 평가받지 못했고, 카베르네 소비뇽 역시 프랑스 보르도에 비견되는 품종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73년산 S. L. V. 카베르네 소비뇽은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다. S. L. V. 포도밭의 화산성 토양에서 자란 카베르네 소비뇽은 단단한 골격과 긴 여운을 지녔고, 이는 이후 스택스 립 와인 셀러 스타일의 근간이 되었다. 1986년 인수한 페이(FAY) 포도밭은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카베르네 식재지로, 충적토 토양은 S. L. V.와는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S. L. V.가 단단한 구조와 밀도를 보여준다면, 페이는 보다 유연하고 벨벳 같은 질감을 더한다. 두 포도밭의 대비는 위니아스키가 말한 ‘벨벳 장갑을 낀 강철 주먹’을 실현하는 토대가 되었다.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역사는 언제나 땅의 잠재력을 믿었던 창업자의 판단에서 출발했다. 위니아스키는 2024년 별세했지만, 그가 세운 포도밭과 철학은 여전히 와이너리의 근간을 이룬다.

스택스 립 와인 셀러 스타일S. L. V. 카베르네 소비뇽은 구조가 분명한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블랙베리와 카시스 중심의 농축된 과실 향에 흑연과 타바코의 뉘앙스가 더해지고, 단단하지만 균형 잡힌 타닌이 와인의 골격을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과 구조가 더욱 또렷해지는 스타일로, 오늘날에도 스택스 립 와인 셀러 스타일을 상징하는 와인으로 여겨진다. 페이 카베르네 소비뇽(FAY Cabernet Sauvignon)은 출발점이 다르다. 붉은 체리와 라즈베리, 바이올렛 계열의 향이 먼저 나타나며 질감 역시 보다 부드럽고 유연하다. S. L. V. 카베르네 소비뇽이 구조와 힘을 보여주는 와인이라면, 페이 카베르네 소비뇽은 보다 섬세한 향과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1974년 빈티지에서 유독 뛰어난 오크 통 하나가 발견되었고, 위니아스키는 이 와인을 따로 병입했다. 이것이 캐스크 23(Cask 23)의 시작이다. 이후 캐스크 23은 S. L. V.와 페이, 두 포도밭의 포도를 함께 사용해 완성되는 와인으로 자리 잡았다. 블랙 체리와 다크 초콜릿, 향신료의 복합적인 향과 깊이 있는 구조가 특징이다.
아르테미스 카베르네 소비뇽(Artemis Cabernet Sauvignon)은 나파 밸리 전역에서 엄선한 포도를 블렌딩해 만든 스택스 립 와인 셀러의 대표적인 레드 와인이자 브랜드의 핵심 라인업이다. 블랙 체리와 블랙 커런트, 다크 초콜릿과 삼나무 계열의 향이 나타나며 실키한 타닌과 함께 균형 잡힌 구조를 보여준다. 단일 포도밭 와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균형 잡힌 스타일을 보여준다.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아베타 소비뇽 블랑(Aveta Sauvignon Blanc)은 자몽과 구아바 계열의 향과 선명한 산도가 특징이며, 카리아 샤르도네(Karia Chardonnay)는 잘 익은 멜론과 복숭아 풍미에 절제된 오크가 더해진 스타일이다.
50년 이후의 시간, 다음 세대를 설계하다한 병의 와인이 세계 와인사의 흐름을 바꾼 지 50년이 되는 해가 2026년이다. 이를 기념해 5월에는 한정 와인이 공개될 예정이다. 1973병만 생산되는 ‘파리의 심판 50주년 기념 S. L. V. 매그넘’으로, 1972년에 식재된 오리지널 블록에서 수확한 포도로 알려졌다. 이어 10월 10일에는 스택스 립 와인 셀러 에스테이트에서 시그너처 이벤트가 열리며, 1976년 역사적 테이스팅에 참여했던 나파의 개척자 와이너리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현재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이탈리아의 안티노리(Antinori) 가문 아래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1385년부터 26대에 걸쳐 와인을 생산해 온 안티노리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 와인사의 흐름을 함께해 온 대표적인 가족 경영 와인 가문이다. 슈퍼 투스칸을 통해 전통 규범을 넘어섰던 가문과 파리의 심판을 통해 규범을 뒤집었던 와이너리의 만남이다.
2024년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최초로 재생 유기농 인증(ROC™)을 획득했다. 이는 토양 복원, 생물 다양성, 수자원 관리까지 아우른다. 동시에 안티노리 가문은 창립자 가족이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아카디아 빈야드를 에스테이트로 다시 통합하며 역사적인 포도밭을 하나로 묶었다. 1976년 ‘파리의 심판’이 나파 밸리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면, 오늘의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그 이후의 시간을 이어가는 단계에 있다. 한 번의 역사적 사건에 머무르기보다, 그 유산을 다음 세대의 기준으로 이어가는 와이너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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