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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아래 펼쳐진 하늘, 호암미술관 이우환 신작 전시

  • bhyeom
  • 12월 8일
  • 4분 분량

Silentium by Lee Ufan 오래 닫혀 있던 ‘옛돌정원’이 처음으로 개방되고, 그곳에 이우환의 신작 조각이 자리 잡았다. 호수와 억새, 하늘빛과 나무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한 장면을 이루는 정원에서 작품은 원래 그 자리를 오래 품고 있던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어진 동선은 전통 정원 ‘희원’으로 흘러가고, 두 정원은 자연의 결 속에서 이우환의 세계를 하나로 잇는다.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철판) 320 X 370 X 7cm (자연석) 91 X 91 X 115cm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철판) 320 X 370 X 7cm (자연석) 91 X 91 X 115cm © Lee Ufan
‘실렌티움’에 선 이우환 작가 (2025)
‘실렌티움’에 선 이우환 작가 (2025) © Lee Ufan

한국 대표적인 사립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호암미술관은 1982년 개관한 이후 전통 한옥 형태의 본관 건축물과 한국식 전통 정원 ‘희원’, 그리고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산책하는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꾸준히 발전시켜왔다. 이번 ‘옛돌정원’ 개방을 통해 너른 호수를 내려다보는 산책로와 작은 구릉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와 식물을 통해 호암미술관 고유의 정체성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이우환의 신작 전시가 11월 4일부터 상설 전시로 공개되어, 관람객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작품을 꾸준히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 미술계에서 이우환은 돌, 철판, 유리 같은 최소한의 재료로 ‘관찰의 감각’을 되살리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영국 <아폴로 매거진(Apollo Magazine)>의 평론가 마틴 허버트(Martin Herbert)는 그의 작업을 “빠른 시대에 잊힌 느림의 미학을 회복시키는 예술”이라 말하며, 시간과 자연 속에서 감각을 열어가는 방식에 주목한다. <아트포럼(Artforum)>의 파블로 라리오스(Pablo Larios) 역시 “수십 년 같은 재료를 반복해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 정밀함”이라 평가하며, 그의 설치미술이 관람자, 사물, 공간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낸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과 장소성이 중요한 호암미술관 정원 전시와 정확히 맞물리며, 공간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설치미술의 경험적 특성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관계항 – 만남’,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 (스테인리스 스틸) 500 X 200cm
‘관계항 – 만남’,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 (스테인리스 스틸) 500 X 200cm © Lee Ufan
‘관계항 – 하늘길’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 1000 X 120 X 2cm (2pcs) (자연석) 90 X 125 X 115(h), 125 X 100 X 110(h)cm
‘관계항 – 하늘길’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스테인리스 스틸) 1000 X 120 X 2cm (2pcs) (자연석) 90 X 125 X 115(h), 125 X 100 X 110(h)cm © Lee Ufan

호수를 따라 난 길을 걷다 보면, 정원의 완만한 언덕 덕분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지름 5m의 링 형태 조각 ‘관계항-만남(Relatum-The Encounter)’이다. 스테인리스 스틸이 주변 자연을 비추며 작품 속 공간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안을 드나드는 서로 다른 속도의 사람들과 그 장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함께 마주하게 된다. 현재 미완성 상태인 이 작품은 향후 링 양쪽을 마주 보는 2개의 돌이 더해져 완성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 만남을 기다리는 기대감도 남겨둔다.


정원 더 안쪽을 걷다 보면 키보다 살짝 높은 나무 길이 미로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다. 햇빛을 받은 호숫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처음에는 작은 냇물처럼 보이던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잔디 위에 20m 길이로 놓인 거울 같은 금속판과 돌로 이루어진 ‘관계항-하늘길(Relatum-The Sky Road)’이다. 멀리서 하늘을 비추며 흐르는 물줄기처럼 보이던 작품 위로 한 발씩 내딛는다. 땅을 걷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하늘을 걷고 있다. 구름이 발 아래로 흘러가고, 나무가 흔들리며, 이머시브 아트(immersive art) 전시보다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감각에 순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품 위를 건너며 나누는 웃음과 이야기, 그리고 어느 순간 잔디 위에 앉아 혼자 작품과 마주하는 시간은 전혀 다른 울림을 준다. 거울 표면에 비친 푸른 하늘, 그 옆을 지키고 마주 보며 서 있는 2개의 돌, 바람과 새소리까지 모두 하나의 장면이 되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해서 변하는 작품으로 만든다. 그 순간,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는 작가의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연결된 위쪽 산책로에서는 ‘관계항-튕김(Relatum-Bursting)’을 만날 수 있다. 휘어 있는 두꺼운 금속판과 2개의 돌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고, 바닥의 자갈을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울린다. 시각뿐 아니라 발걸음과 소리까지 연결된 경험이 이어진다.


옛돌정원 건너편에는 호암미술관 본관이 자리한 전통 정원 ‘희원’이 있다. 호암미술관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이 정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맥을 이어가는 숨결이 담겨 있다. 정원과 어우러진 동자석, 문·무인석, 그리고 석불의 전통 조각상과 한옥의 정자, 연못, 돌담과 수목이 어우러진 이곳은 ‘차경(借景)’의 원리로 주변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희원에는 이우환 작가의 또 다른 신작인, 라틴어로 ‘침묵(silentium)’을 뜻하는 ‘<실렌티움(묵시암)>’이 있다. 전시장 입구에는 묵직한 돌과 두꺼운 철판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그 앞에 서면 저절로 숨 고르며 느려진 발걸음으로 실내에 이르게 된다.



‘실렌티움(묵시암)’ 2025, 자연석, 목탄 (자연석) 78 X 63 X 80(h)cm (목탄 그림자) 102 X 121cm
‘실렌티움(묵시암)’ 2025, 자연석, 목탄 (자연석) 78 X 63 X 80(h)cm (목탄 그림자) 102 X 121cm © Lee Ufan

안으로 들어서면 나란히 이어진 3개의 공간이 각기 다른 새로운 작품을 품고 있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플로어 페인팅(Floor Painting)’은 바닥을 캔버스로 삼았다. 원형의 붉고 푸른 색채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하얀 조약돌이 액자 프레임처럼 감싸고 있다. 자연스럽게 벽을 따라 한 바퀴 돌게 되고, 색이 바닥에서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은 땅속의 기운이 표면 위로 번지는 모습과 닮았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월 페인팅(Wall Painting)’이 있다. 이우환 예술 세계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을 통해 극도의 절제미를 보여준다. 2개의 점은 미세한 색채의 변화로 깊이를 만들고, 넓은 여백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채워진 것보다 채워지지 않은 것이 더 큰 울림을 만든다는 그의 작업 세계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공간에서는 돌 하나와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운 ‘섀도 페인팅(Shadow Painting)’이 자리 잡고 있다. 조명 아래에서 생기는 실제 그림자와, 작가가 그려 넣은 그림자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조명 위치가 달라지면 실제 그림자는 끝없이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그려진 그림자는 변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과 고정된 것이 한 자리에서 겹쳐지며,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 작업들을 마주하는 동안 관람자는 말없이 시선을 머무르게 된다. 색의 떨림, 여백의 호흡, 그림자의 변화가 감각을 서서히 열어주고, 그 속에서 침묵은 더 이상 빈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명료한 시간으로 변한다.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실렌티움(묵시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리고 보이는지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에서 회화와 철학을 공부한 뒤, 1960년대 후반 일본의 ‘모노하’ 운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했다. 자연석, 금속판, 거울 등 최소한의 재료를 통해 사물, 공간, 관람자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세계 미술사에 또렷한 존재감을 남겼다. 이번 호암미술관 프로젝트는 작가가 직접 정원과 자연, 호수와 돌이라는 풍경을 자신의 설치 작업의 배경으로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그 덕분에 그의 작업을 상설로 마주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생겼다. 이 전시에서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걸음을 조금 늦추는 순간, 작품이 가장 선명해진다. 사람들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작품 앞에 혼자 서게 되고, 그 고요 속에서 주변의 미세한 변화들이 또렷해진다. 낙우송 숲길을 바라보는 ‘호암 카페’에서 잠시 머무는 시간도 좋다. 정원을 걷고 멈추고 다시 걸어 나오는 동안, 이우환의 작품은 작은 여백과 에너지를 남긴다. 자연을 가까이 두고 싶다면 한 번쯤 이 길 위에 서서 발 아래 펼쳐진 하늘을 밟아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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