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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론 뮤익>전

  • bhyeom
  • 3일 전
  • 4분 분량

사람보다 더 생생한 조각, 론 뮤익이 서울에 오다 “두 눈으로 마주한 순간, ‘죽음을 상징한 대형 해골’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천장 가까이까지 수직으로 쌓인 뼈 더미 아래, 우리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2025년 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론 뮤익(Ron Mueck)의 대형 설치작 ‘매스(Mass)’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순히 ‘극사실주의 조각가’의 회고전이라고 정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감각이었다. 1.2m 크기의 해골 조각 100개가 천장을 향해 수직으로 쌓인 풍경은 관람자를 비일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치킨/맨
‘치킨/맨’, 2019, 혼합 재료, 86 × 140 × 80cm.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 테 푸나 오 와이웨투 컬렉션, 아오테아로아 뉴질랜드. photo © Marcus Leith

프레스 콘퍼런스가 열린 현장은 일찍부터 만석이었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 공동 주최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실질적으로는 브랜드 로고조차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동반자’로서의 기여가 더욱 깊이 각인된다. “두 달에 걸쳐 선박으로 운송되었고, 설치에도 몇 주가 소요됐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홍이지 학예연구사의 말처럼, 이 전시의 실현은 전례없는 협업의 산물이었다. 2023년 파리에서 전시 논의가 시작됐고, 작품 투어 일정, 운송 경로, 설치 환경 등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했던 프로젝트다. 1984년 설립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은 럭셔리 브랜드가 만든 사립 문화 기관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의 사례 중 하나로, 40년 넘게 동시대 예술과의 동반을 이어오고 있다. 전시장에서 브랜드 로고는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이 전시가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까르띠에의 철학과 실천이 자리한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에서 태어난 프로젝트로, 럭셔리 브랜드가 예술 생태계에 기여할 수 있는 모델의 한 예다. <론 뮤익> 전시는 호주 출신의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의 아시아 최초 대규모 회고전으로, 4월 11일부터 7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다. 전시는 서울관의 5전시실, 6전시실 걸쳐 이루어지며, 총 24점의 조각, 사진, 영상을 통해 뮤익의 30여 년 작업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전시 전반은 인체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탐구와 조각적 실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대표작 ‘매스(Mass)’다. 각각 1.2m 높이에 60kg이 넘는 해골 100개로 구성된 이 대형 설치물은 단지 죽음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아니다. 파리의 지하 묘지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전시 공간에 따라 배치와 구성이 달라지는 설치 조각이다. 작품은 호주 멜버른의 빅토리아 국립미술관(Victoria National Gallery, Melbourne)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2017년 첫 전시에서는 18세기풍 갤러리를 가득 메운 수평적 배치로 선보였다. 2023년 파리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전시에서는 보다 흩어진 형태로 재구성되어 심리적 긴장감을 부각했다. 세 번째 공개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에서는 14m에 달하는 천장 높이와 천창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을 활용해 해골을 수직적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지하 묘지를 연상시키는 이 연출은 관람객에게 강렬한 몰입감과 함께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뿐 아니라 과거 보안사 건물을 리모델링해 2013년 개관한 현대미술관의 공간적 맥락까지 고려한 연출을 통해 작품과 장소가 함께 호흡하게 만든다.


‘론 뮤익’ 전시 모습
‘론 뮤익’ 전시 모습. 전시장 중앙에는 침대에 누운 여성 조각(‘침대에서’)이, 전면에는 닭과 마주 앉은 중년 남성의 조각(‘치킨/맨’)이 배치되어, 작가의 대표작들이 하나의 시선 안에서 공존한다.
매스
100개의 두개골을 설치한 작품 '매스', 550 x 1487 x 5081.8 cm

‘매스’의 경우 호주에서 제작된 각 60kg에 달하는 100개의 해골을 개별 나무 상자에 담아 2개월 동안 선박으로 운송했으며,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구성과 설치에만 몇 주가 소요되었다. 이 작품은 고정된 형태를 갖춘 조각이 아닌, 공간의 구조와 큐레이터의 해석에 따라 매번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는 설치 작품이다. 각 공간에 맞춰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은 단순한 설치를 넘어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현장에서 완성되는 작품임을 보여준다. ‘매스’는 전시를 통해 공간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하고, 관람객의 신체적 체험을 유도하는 대표적 사례다. 론 뮤익은 1958년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나 장난감 공방을 운영하던 독일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손 기술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체득했다. 영화와 텔레비전 특수분장사로 활동하던 그는 1996년 화가 폴라 레고(Paula Rego)와의 협업을 계기로 조각에 입문했고, 이듬해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선보인 ‘죽은 아빠(Dead Dad)’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의 조각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묘사로 유명하지만, 단순한 재현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과 정서를 탐구한다. 너무 작거나 커서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조각은 관람자의 시선과 감정을 의도적으로 흔들며 몰입을 유도한다. 이번 전시는 아시아 최초의 회고전이자,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한 기회로, 평면 회화보다 이동과 설치가 훨씬 까다로운 조각 전시의 특성상 실현 자체가 드물다.


‘마스크 II’, 2002
‘마스크 II’, 2002, 혼합 재료, 77 × 118 × 85cm. 개인 소장. 작가의 얼굴을 4배 크기로 재현한 자화상. 텅 빈 뒷면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유령’, 1998/2014
‘유령’, 1998/2014, 혼합 재료, 202 × 65 × 99cm, 야게오 재단 컬렉션. photo © Alex Delfanne

전시에는 뮤익의 시기별 주요 조각 작품과 스튜디오 사진 연작, 다큐멘터리 필름 등 24점 소개된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마스크 II(Mask II)’는 작가 본인의 얼굴을 4배 크기로 확대 재현한 작품이다. 실감 나는 피부와 수염 자국, 눈꺼풀의 섬세한 표현이 돋보이는 이 조각은 뒷면이 텅빈 채 남겨져 있어 관람객에게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침대에서(In Bed)’는 멍한 눈빛으로 침대에 누운 여성의 모습을 통해 고독과 피로의 감정을 극대화하며, ‘쇼핑하는 여인(Woman with Shopping Bags)’은 육아에 지친 엄마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조각 속 비닐봉지에는 실제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들이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젊은 연인(Young Couple)’은 정면에서는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뒷모습을 통해 관계의 긴장감과 복잡한 감정을 암시한다. 특히 ‘치킨/맨(Chicken/Man)’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아트 갤러리(Christchurch Art Gallery)의 의뢰로 제작되어 처음으로 해외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으로, 중년 남성이 식탁 위 닭과 대치하는 모습은 긴장과 침묵 속의 감정을 생생히 전한다. 이외에도 대만 야게오 재단(Yageo Foundation)에서 대여한 ‘유령(Ghost)’, 유럽 주요 미술관과 개인 소장품이 포함되어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들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론 뮤익의 작업실
‘론 뮤익의 작업실’, 디본드 패널에 컬러 사진, 79.5 × 100cm. © 고티에 드블롱드 photo © Gautier Deblonde

전시 후반에는 뮤익의 창작 과정을 담은 사진과 고티에 드블롱드(Gautier Deblonde)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상 두 편이 상영된다. 특히 ‘스틸 라이프: 작업하는 론 뮤익(Still Life: Ron Mueck at Work)’은 작가의 조용한 작업실 풍경과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조각이 생명을 얻는 과정을 밀도 높게 보여준다.

<론 뮤익>전은 단순한 조각 감상을 넘어, 관람객 스스로가 작품과 공간 사이를 걸으며 존재와 시간, 감정과 기억을 사유하는 드문 경험을 선사한다. 조각이라는 장르 특유의 물성과 중량감, 거대한 크기와 고요한 감정이 공존하는 이 전시는, 단 한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긴 시간의 기록이며 동시에 그것을 체감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예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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