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첫 개인전, 피에르 위그 <리미널>
- bhyeom
- 5월 30일
- 4분 분량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 서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작품 세계는 단번에 직관적으로 이해되진 않는다.현실과 허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으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새롭게 쓰고 있는 작가다.<리미널>이라 명명된 이번 전시는 존재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으로 우리를 이끈다.관객은 이 낯선 존재들을 끝까지 좇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른다.

설치미술의 경계를 넘는 작가, 피에르 위그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전시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마치 우주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한 발 한 발 디디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청각과 촉각, 내면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잠시 후, 거대한 스크린 안에서 방랑하는 ‘얼굴 없는 인간’이 등장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수족관 속에서는 브랑쿠시의 조각을 등에 진 채 기묘하게 움직이는 소라게가 시선을 끌었다. 관객은 이 알 수 없는 형상들을 좇아가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피에르 위그(b.1962)는 파리 국립고등예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 미술계에서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설치미술로 주목받았다. 현재 칠레 산티아고를 거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존재와 비존재, 사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예술 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설치미술을 기반으로 하되, 전시장 자체를 살아 있는 환경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수풀로 채운 ‘A Forest of Lines’(2008), 폐쇄된 아이스링크장을 생태계로 탈바꿈시킨 ‘After ALife Ahead’(2017),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배경으로 한 ‘Human Mask’(2014) 등이 있다. 이분법적인 세계를 해체하고, 그 경계를 다시 설정하는 작업을 이어온 그는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시한, 삶의 모든 것이 미디어 이미지로 소비되는 ‘스펙터클 사회’ 개념에서 영감을 받아,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해석해왔다. 초기에는 영화와 퍼포먼스로 시작해, 이후에는 자연과 기술, 우연과 시스템이 얽힌 생태적 설치미술로 작업 영역을 확장했다.

예술을 위한 수집, 모두를 위한 공유, 피노 컬렉션2024년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 열린 <리미널>은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탈바꿈시킨 몰입적 시도로, 국제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프리즈(Frieze)의 평론가 션 번스(Sean Burns)는 “올해 베니스에서 본 전시 중 오직 <리미널>만이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예술가의 비전이 온전히 구현된 공간이었다”고 평하며, 단일 작가가 구현한 ‘완전한 세계’라는 점에서 높은 몰입감을 강조했다. 옵저버(Observer)의 엘리사 카롤로(Elisa Carollo)는 “세계는 우리 없이도 계속될 것”이라는 말로, 인간 중심의 질서가 전복된 미래상을 암시했다.
이 전시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션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과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의 협업으로 시작되었다. 피노 컬렉션은 케어링 그룹(Kering Group) 창립자 프랑수아 피노(François Pinault)가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현대미술 컬렉션으로, 파리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와 베니스의 팔라초 그라시,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 등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실험성과 미학을 꾸준히 조명해왔다. 이 컬렉션은 유럽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끄는 주요 플랫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 연장선에서 기획된 이번 전시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으로, 2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개최된다. 베니스에서 선보인 전시에 기반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한국으로 확장하는 의미 있는 자리다.

리미널, 질문하는 생태계
전시명 ‘리미널’은 라틴어 limen(문턱)에서 유래된 말로 ‘경계에 있는’, ‘과도기의’,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위그는 이를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전시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다. 현실과 허구,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의 움직임과 소리 등 환경적 요소에 따라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생태적 전시’를 구성한다. 바로 이 리미널한 상태에서 새로운 의미와 존재가 태어난다.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의 두 전시장, 블랙박스와 그라운드 갤러리를 모두 활용해 구성되었다. 각각 빛과 어둠, 몰입과 해방의 공간처럼 작동하며, 위그의 작품 세계가 ‘환경’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호흡한다. 특히 블랙박스에서는 감각의 불확실성과 조우하고, 그라운드 갤러리에서는 인식과 존재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블랙박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전시명과 같은 이름의 영상 설치 작품 ‘리미널’ 속,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다. 감정도, 자아도 없이, 세계의 표면을 조용히 떠다니는 이 존재는 조형물이 아니다. 위그는 이 형상을 ‘환경’으로 제시한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보이지 않는 정보를 기억하며, 그 몸짓 하나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말도 표정도 없는 이 낯선 존재 앞에서 관객은 본능적으로 비교하게 된다. 나와 닮았지만, 나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인간인가? 인간다움이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가? 감정일까, 기억일까, 혹은 얼굴이라는 형상 그 자체일까. 위그는 이 말 없는 존재를 통해, 관객 스스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의 경계선을 탐색하게 만든다. 결국 이 존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마주하게 한다. ‘이디엄(Idiom)’은 주체와 객체의 역할을 전복시킨다. 이 작품에서는 황금빛 마스크가 주체로서, AI로 학습된 마스크들은 스스로 언어를 생성하고 교류한다. 인간은 단지 그 마스크를 운반하는 운반자일 뿐이다. 신체는 제공하지만, 대화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소외된다. 인간이 주도한다고 믿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여기서도 발생한다.
수조 속에서 조용히 기어다니는 소라게. 그 등이 낯익다. 위그의 ‘주드람 4(Zoodram 4)’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대표작 ‘잠든 뮤즈(Sleeping Muse)’를 본뜬 조각을 짊어진 생명체를 보여준다. 인간 예술의 유산이 비인간 생명체의 '껍데기'가 되어 떠돌고 있는 모습이다. 기묘하고도 애처로운 이 장면은 생명과 예술, 유산과 생존의 경계가 뒤섞이는 위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폐허가 된 레스토랑 안에 홀로 남겨진 원숭이를 비춘다. 인간의 가면을 쓰고 인간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아닌 존재. 이 존재는 정지된 세계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학습된 지시와 본능 사이를 오가며 반복된 몸짓을 이어간다. 이 장면은 인간이 사라진 공간에서 ‘인간’이라는 가면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흔적처럼 다가온다.

그라운드 갤러리의 대형 스크린에서 마주하게 되는 ‘카마타(Camata)’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견된 인간 해골을 중심으로, 기계가 알 수 없는 의식을 수행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영상은 시작도 끝도 없이, 센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시간 편집되며 전개된다. 무표정한 기계가 인간의 유해를 둘러싸고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이 장면은 마치 장례 의식 같은 인상을 남긴다. 의식과 형식, 생과 사의 경계는 흐려지고, 묵직한 숭고함이 조용히 솟아오른다. 이외에도 전시에는 인간의 뇌파를 시각화한 ‘U움벨트 – 안리(UUmwelt – Annlee)’, 실제 암세포 환경을 실험한 ‘암세포 변환기(Cancer Variator)’, 안개와 향, 소리로 작동하는 ‘오프스프링(Offspring)’, 캄브리아기 생물을 모티브로 한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각각 생명과 시간, 언어와 진화를 둘러싼 탐구를 이어가며, 작가가 말하는 ‘완결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리미널>은 관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객은 말 없는 형상들과 마주하며, 결국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서울로 이어진 질문
이러한 사유의 장이 서울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어져 온 후원이 자리한다. 케어링 그룹 산하의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는 베니스 전시에 이어 서울 전시까지 후원을 이어가며, 예술과 패션, 수집과 창작을 잇는 문화적 행보를 실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는 보테가 베네타가 리움미술관과 함께한 두 번째 파트너십 프로젝트로, 브랜드의 예술적 비전과 장인 정신을 더욱 깊이 있게 반영한다. 전시 작품 중 하나인 ‘이디엄’을 위해 제작한 맞춤 의상은 작가와 브랜드의 협업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결과물로, 예술과 럭셔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를 상징한다.
<리미널>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열린 환경이다.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감각, 생명과 시스템이 얽히는 이 복합적 무대는 그 자체로 동시대 예술이 도달한 새로운 지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무대는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다. 관객은 더 이상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질문 앞에 서는 이가 된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Liminal> 전시 정보
기간 2025년 2월 27일~7월 6일 장소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그라운드 갤러리
전시 구성 조각, 영상 포함 총 12점의 작품 주최 리움미술관
후원 보테가 베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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