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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계업계의 스페셜리스트들

THE SPECIALISTS

 

스페셜리스트의 등장

16세기 종교 박해로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위그노(Huguenot, 프랑스의 칼뱅교도)들은 멀리로는 북아메리카 대륙과 남아프리카, 가까이로는 영국, 독일,네덜란드 등으로 몸을 피했다. 프랑스 동쪽과 맞닿은 국가 중 하나인 스위스는 험준한 쥐라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위그노들이 몸을 숨기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장인과 같은 기술자가 많았던 위그노들은 망명한 국가의 산업에 영향을 미쳤는데, 쥐라산맥에 숨어든 이들은 스위스 시계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농한기에 만들어 팔던 시계 부품은 높은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수요가 점차 늘어난 덕분에 가내수공업 수준에서 전문적으로 부품을 만드는 공방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생산 형태는 스위스 시계에 분업화라는 독특한 특성을 부여했다. 시곗바늘, 다이얼, 케이스, 무브먼트 같은 부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방에서 품질 높은 부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외부에서 부품을 공급받아 시계를 만드는 분업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쿼츠 손목시계의 등장은 스위스 시계업계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10년이 넘도록 이어진 위기를 견디지 못한 시계 브랜드들은 도산으로 내몰렸고,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1980년대 초반을 지나서야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보수성이 초래한 대위기를 겪은 스위스 시계업계는 흡수와 통합을 반복하며 시계 브랜드의 그룹화를 가속시켰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기계식 시계의 완전한 부활을 이룬 뒤에는 그룹 간 경쟁력 강화와 소비자 확보를 위해 분업화의 틀을 흔들기 시작했다. 부품과 무브먼트의 유통은 그룹 내 브랜드로 제한해 타 그룹에 속한 브랜드와 독립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이 과정에서 ‘매뉴팩처(manufacture)’ 개념이 다시 대두되었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제조를 의미하는 단어지만 기계식 시계에서는 인하우스 시계 제조가 가능한 브랜드를 칭한다. 엄밀히 말해 매뉴팩처는 시계 제조 전반에서 생산력을 갖춰야 하지만, 2000년을 기점으로 무브먼트를 자체생산할 수 있다면 이 단어를 쓸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 매뉴팩처는 분업화와 다소 배치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매뉴팩처가 독립성, 독자성, 개성을 의미한다면, 분업화는 공생이나 공유, 협력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매뉴팩처의 재등장으로 전통적 분업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매뉴팩처 전환은 상대적으로 더 까다롭고 뚜렷한 취향을 지닌 고객을 둔 하이엔드 브랜드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고객은 많은 비용을 치르더라도 남들과 다른 시계를 갖고 싶어 했다. 무브먼트를 외부에서 공급받는 방식으로는 고유한 개성을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기계식 시계의 기본인 무브먼트를 하우스에서 만들어야 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많은 수의 하이엔드 브랜드가 한두 가지의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갖추기 시작했고, 점차 보다 많은 부품을 자체 생산했다. 하지만 매뉴팩처 전환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인하우스에서 직접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산 설비와 인력이 요구되었고, 자연스레 비용 문제와도 마주해야 했다. 그간 많은 신소재 개발과 등장이 시계 생산에 도움을 주었지만,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기술 개발과 인력 확보도 문제로 떠올랐다. 특히 컴플리케이션 같은 특수 무브먼트의 설계와 제조는 많은 브랜드에 고민거리였지만, 매뉴팩처 환경으로 바뀌며 더욱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소량 생산하는 컴플리케이션의 특성상 새로운 컴플리케이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자체적으로 설계, 제조해야 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브랜드는 소수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비용을 두고 저울질하다 차선책을 택하기도 한다. 이 무렵 기계식의 부활이 가져온 시계 시장의 활황은 주얼리 브랜드나 토털 브랜드까지 뛰어들도록 했으나, 이들은 기술적인 부분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외부 조력자를 찾아야 했다. 이렇듯분업화의 균열은 스페셜리스트가 활약할 여지를 만들어냈고 무브먼트, 컴플리케이션의 설계와 제작에 특화된 전문가나 집단이 부각하는 계기가 된다.



영원한 자유인, 빈센트 칼라브레제

빈센트 칼라브레제

브랜드 외부에서 컴플리케이션의 설계나 제작을 담당하는 전문가는 과거에도 있었다. 다만 계약 내용을 수행한 다음에는 조용히 무대 밖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일궈낸 인물 중에는 컴플리케이션 설계를 팔아 종잣돈을 마련한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듯하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빈센트 칼라브레제는 어릴 때부터 시계에 흥미를 가졌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제대로 된 시계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테크니션이 된 그는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찾아야 했다. 나폴리에서 스위스 르 로클로 가 티쏘에 입사했고, 이후 여러 브랜드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재능과 노력은 그를 빠른 성공의 길로 이끌었다. 독립 제작자로서 1970년대 후반에 내놓은 바게트형 무브먼트는 코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프로토타입을 구매해 권리를 얻은 코룸은 이를 다듬어 골든 브릿지라 이름 붙였다. 직선 기어트레인을 갖춘 골든 브릿지의 바게트형 무브먼트는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두른 케이스와 어우러져 연출하는 개방감과 전에 없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코룸의 대표 모델로 자리 잡는다. 1980년대 후반에 내놓은 블랑팡의 플라잉 투르비용은 빈센트 칼라브레제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2008년 그가 회사를 블랑팡에 매각하며 개발 부문에 입사(?)하는 형식을 취하며 결과적으로 블랑팡의 인하우스 작품이 되었지만, 손목시계 최초의 플라잉 투르비용을 완성해 블랑팡을 대표하는 모델로 꼽힌다. 투르비용에 비해 구조적인 복잡함으로 도태했던 까루셀도 빈센트 갈라브레제에 의해 손목시계의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 블랑팡이 업계에서 유일하게 투르비용과 까루셀 조합을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다. 스벵 앤더슨(Svend Andersen)과 AHCI(독립시계제작자학회)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한 칼라브레제는 자신처럼 독립 시계 제작의 길을 걷는 워치메이커를 위한 조직을 꾸렸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환영받지 못했던 그의 경험과 독립 제작이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온 커리어가 AHCI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터다.


2010년대 초반 어떤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워치메이커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한번 창조하고 있다. 빈센트 칼라브레제 워치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스페이셜(Spatial) 라인업에는 직선, 알파벳, 동물 모양을 한 무브먼트가 이름 그대로 공간감을 한껏 드러낸다. 그가 골든 브릿지의 창조자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시계들과 과거에 내세웠던 브랜드인 NHC(Nouvelle Horlogerie Calabrese)를 한데 모았다. 빈센트 칼라브레제가 시계와 함께한 시간은 이제 60여 년을 향해 간다. 커리어와 인생이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시계업계의 영원한 창조자이자 스페셜리스트로 남으려 하고 있다.



천재의 궤적, 루드비히 외슬린

루드비히 외슬린

스위스 라쇼드퐁에 위치한 국제시계박물관(Musée International d’Horlogerie) 관장, 시계 브랜드 옥스 운트 주니어(Ochs und Junior)의 설립자는 루드비히 외슬린의 대표 경력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경력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율리스 나르덴과 함께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동시에 손목시계의 시대로 접어든 이래 율리스 나르덴이 가장 빛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루드비히 외슬린과 율리스 나르덴의 인연은 전 소유주이자 CEO이던 고 롤프 슈나이더(1936~2011)가 성장 동력을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들른 시계 매장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 놓인 벽시계 형태의 애스트로비움 클락에 감명받은 롤프 슈나이더는 제작자를 찾아 손목시계로 만들 수 있는지 물었다. 그 클락을 제작한 루드비히 외슬린은 이탈리아 태생이나 바젤과 베른의 대학에서 철학, 고고학, 고대 역사, 천문학, 물리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그가 복원가를 꿈꾸며 견습생 시절에 만든 애스트로비움 클락의 손목시계화는 용솟음치던 그의 지적 호기심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브랜드에 고용되거나 계약에 따른 납품 관계가 아닌 조력자로 율리스 나르덴과 손잡은 루드비히 외슬린은 천문시계 3부작이라 부르는 트릴로지로 시계업계에 충격을 던진다. 첫 모델인 애스트로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1985년 발표했고 시계업계가 긴 수렁에서 벗어나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만들어낸 걸작이라 크나큰 찬사를 받았다. 유일하게 구할 수 있었던 ETA의 범용 무브먼트 칼리버 2892를 베이스로 태양과 달의 궤적,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일식과 월식을 구현하는 천문시계였다. 3년 뒤인 1988년 플래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1992년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를 발표하며 역대 천문학자를 기리는 동시에 훗날 등장할 천문시계 장르의 토대를 마련했다(지금까지도 트릴로지를 능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천문시계는 거의 없다).


루드비히 외슬린의 이름은 ‘퍼페추얼 루드비히’로 불린 적이 더 많을 것 같다. 윤년에도 사용자의 조정 없이 날짜 정보를 변경하는 퍼페추얼 캘린더는 기본적으로 4년을 주기로 표시한다. 대부분의 캘린더 기능이 그렇지만 날짜를 뒤로 돌릴 수 없다. 일반적인 데이트 기능이 날짜를 조작할 때 뒤로 돌리지 못하므로 계속 앞으로 돌려 현재 날짜로 되돌아오는 방식임을 떠올린다면 그 확장판의 최고봉인 퍼페추얼 캘린더는 날짜를 돌릴수록 미래로 향하는 셈이다. 다행히 연도 표시가 없다면 긴 조작으로 현재로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는 상당한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퍼페추얼 캘린더의 세팅 실수나 잘못된 조작은 때때로 치명적이다.


퍼페추얼 루드비히는 GMT 기능의 조작법을 기본으로 삼는다. GMT 기능은 방식에 따라 다르긴 하나 시침을 단독 조정하는 방식은 날짜를 과거와 미래로 넘나들 수 있다. 루드비히 퍼페추얼은 당시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에 없었던 GMT 기능을 담고 등장해, 날짜를 뒤로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퍼페추얼 캘린더였다. 이는 이후에 등장한 퍼페추얼 캘린더의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자명하다. 이 외에도 율리스 나르덴의 상징적인 컴플리케이션인 프리크(Freak)는 크라운을 삭제하고 케이스 앞뒤 베젤로 와인딩과 조작을 하는 유니크한 조작 체계를 갖춘 까루셀로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프리크는 기본 구조를 유지하며 매년 진화를 거듭했는데, 기계식 시계의 핵심 부품인 이스케이프먼트의 소재로 실리시움을 사용하며 현재의실리시움 헤어스프링, 밸런스, 이스케이프먼트의 사용에 해법을 제시한 것도 율리스 나르덴과 루드비히 외슬린의 공로다.


국제시계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박물관 건립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MIH(Musée International d’Horlogerie) 워치를 만들었다. 애뉴얼 캘린더 모델로, 애뉴얼 캘린더는 고작 9개의 부품만으로 기능한다. 기능하는 부품 수만큼이나 미니멀하며 모던한 디자인으로 완성한 MIH 워치는 독립 시계 제작자인 파울 게르버(Paul Gerber)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고, 이것은 단종된 제니스의 캡틴 윈저 애뉴얼 캘린더 등에 장착되기도 했다. 한 명의 스페셜리스트로 시계업계에 빛나는 업적을 남겨온 루드비히 외슬린은 아들과 함께 옥스 운트 주니어 브랜드로 커리어를 계속 써 내려가는 중이다.



점프 마스터와 아장호

아장호

케이스 중앙과 이어진 하나의 러그로 스트랩을 연결해 우아함을 뽐내는 반클리프 아펠의 시계는 다이얼 위에서 더욱 우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포에틱 컴플리케이션으로 명명한 우아한 시계들은 이름처럼 시나 동화 같은 연출로 많은 이들을 사로잡는다. 포에틱 컴플리케이션을 대표하는 모델 퐁 데 자모르(Pont des Amoureux) 워치는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시침에 해당하는 여자와 분침에 해당하는 남자가 다리 위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다 정오와 자정, 하루에 단 두 번 아주 잠시 만날 수 있다(2019년 모델이 리뉴얼되면서 8시 방향 버튼을 누르면 언제든 둘을 만나게 할 수 있다). 레트로그레이드로 구현한 기능은 반클리프 아펠 공방에서 제작한 다이얼과 오브제를 거쳐 다이얼 속에서 동화를 펼쳐낸다. 레트로그레이드는 아장호가 공급한 모듈이 핵심으로 발플러리에(Valfleurier) 칼리버 Q020을 엔진 삼아 구동한다. 애틋함을 자아내는 남녀의 아주 짧은 만남은 찰나의 예술과도 같은 레트로그레이드 모듈의 점핑이 담당한다. 미학적 요소로 가득한 다이얼과 달리 이 모듈은 정확한 작동을 위해 대단히 기계적인 모습으로 반전을 드러낸다. 포에틱 컴플리케이션에서의 또 다른 레트로그레이드인 포에틱 위시와 페어리, 듀얼 타임인 오르 디시 & 오르 다이에르(Heure d’Ici & Heure d’ailleurs), 보석으로 태양계 행성의 움직임을 화려하게 그려낸 미드나이트 플라네타리움, 미드나이트 인 파리같은 천문시계도 아장호의 대표작이다.


아장호는 워치메이커 출신의 장-마르크 비더레흐(Jean-Marc Wiederrecht)가 1996년에 설립한 회사다. 그는 제네바 시계학교를 졸업하고 워치메이커를 거쳐 특수한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스페셜리스트로 자리 잡았다. 그는 10대에 접한 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에 깊은 감명을 받아 워치메이커의길을 택한 이래,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아장호는 쟁쟁한 시계 브랜드, 주얼러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에르메스도 그의 큰 고객사다. 에르메스가 발표한 인상 깊은 모델 중 다수는 아장호의 손을 거쳤다. 시간을 잠시 멈춰 여유를 가진다는 프랑스식 위트를 기능으로 구현한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 아쏘 퍼페추얼 캘린더와 아쏘 GMT가 그에 속한다. 해리윈스턴은 스와치 그룹으로 편입된 이후, 최근 다소 주춤한 상황이나 2000년대에는 활발하게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했다.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의 위상을 확립한 오푸스 시리즈의 오푸스 9는 체인과 보석을 이용한 타임 디스플레이로 주목받았다. 이는 아장호가 아닌 장-마르크 비더레흐의 이름을 빌려 발표했고, 해리윈스턴의 퍼페추얼 캘린더 또한 그의 작품 중 하나다. 해리윈스턴은 1990년대에 이미 장-마르크 비더레흐와 접촉해 그의 재능을 활용하고자 했다. 이 무렵 그는 레트로그레이드 기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훗날 ‘점프 마스터(레트로그레이드의 점핑에서 유래)’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 외에도 MB&F의 오롤로지컬 머신시리즈와 최근 개발한 수동 크로노그래프 아장그라프를 외부에 공급하고 있다. 아장호의 무브먼트나 모듈에는 특징적인 디테일을 적용한다. 나뭇가지 같은 곡선의 브리지를 사용해 특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브랜드의 시계에 담겨 있더라도 숨길 수 없는 스페셜리스트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림에 감춰진 답을 찾아내는 숨은 그림찾기의 즐거움과도 같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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