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워치의 선구자들 Part 3

The Pioneers of Pilot’s Watch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Ref. 806 리에디션 모델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Ref. 806 리에디션 모델


활짝 열린 민간 항공 시대와 파일럿 워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처음 등장한 제트엔진은 비행기의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비행 속도와 거리 등 모든 부분에서 향상을 가져왔다. 전쟁이 종료되자 이는 군용에서 민간으로 옮겨가 큰 변화를 촉발했다. 1952년, 제트엔진을 단 여객기 드 하빌랜드 106 코멧이 등장해 대륙과 대륙을 연결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해지며 여객과 물류의 이동이 일상화되자 항공 산업도 도약을 맞이한다. 같은 해 브라이틀링에서는 내비타이머로 명명한 파일럿 워치를 발표한다. 최초의 내비타이머 Ref. 806은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명가 비너스(Venus)의 칼리버 178을 장착했다. 3·6·9시의 스리 카운터를 갖춘 수동 크로노그래프로 다이얼 상단에는 A. O. P. A(Aircraft Owners and Pilots Association)의 로고를 달고 있었다. A. O. P. A의 공식 시계로 채택된 내비타이머는 당시 항공 산업의 성장과 파일럿을 위한 프로페셔널한 용도로 제작된 시계라는 것을 뜻했다. 기능에서는 내비타이머를 상징하는 디테일로 여기는 슬라이드 룰을 장착했다. 안전한 비행을 도모하는 파일럿의 툴 워치로 완성된 내비타이머는 이후 파일럿 워치의 대표 모델로 꼽히게 된다.


내비타이머의 슬라이드 룰은 1940년대 브라이틀링의 크로노맷에서 먼저 발견된다. 지금의 크로노맷과 비교한다면 디자인이 매우 상이한 모델로 내비타이머에 더 가깝다. 그 때문에 이 모델은 다이얼 바깥쪽에 세밀한 눈금과 숫자를 프린트했고, 회전 베젤로 슬라이드 룰 기능을 수행했다. 이것을 이용하면 간단한 계산과 비행에 필요한 각종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플라이트 컴퓨터 E6B를 응용한 것으로 브라이틀링 설립자 윌리 브라이틀링이 크로노맷에 이식했다. 플라이트 컴퓨터 E6B는 미 해군의 필립 달튼이 개발했고, 필립 반 혼 윔즈가 권리를 획득했다. 달튼이 비행기 사고로 생을 마감한 이후 윔즈는 이를 거듭 개량한 E6C, E10을 내놓으며 비행 항법 발전에 이바지한다.



브라이틀링 1987년 Ref. 81950 라인업
브라이틀링 1987년 Ref. 81950 라인업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B01 크로노그래프 43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B01 크로노그래프 43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B01 크로노그래프 43

크로노맷에서 슬라이드 룰을 이어받은 내비타이머는 플라이트 컴퓨터인 E6B를 베젤과 다이얼 바깥쪽 인덱스에 이식해 실제 비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사칙연산을 비롯해 비행 속도, 비행 가능 거리, 연료량 등의 정보는 베젤과 다이얼 인덱스(현대적인 내비타이머에 접어들면서는 케이스 백에 단위 환산표나 온도 환산표를 새겨 넣었다)의 눈금을 일치시키고 숫자를 읽는 방식으로 얻어냈다. 물론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용법을 숙지해야 했으나, 손목 위 시계를 이용해 빠르게 원하는 수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편의성을 제공했다. 이 같은 기능성을 바탕으로 내비타이머는 A. O. P. A의 공식 시계로 활약하게 된다. 내비타이머가 갖춘 기능성에 기반한 독창적인 디테일은 내비타이머를 파일럿 워치를 대표하는 모델 중 하나로 등극하게 했다. 슬라이드 룰에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접목한 복잡성은 파일럿뿐 아니라 많은 시계 애호가를 매료시켰다. 내비타이머는 개성적인 디테일을 유지하면서 무브먼트와 케이스 지름의 변화로 세대를 거듭했다. 현재 내비타이머는 인하우스에서 생산한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B01을 탑재한 43mm 케이스가 중심을 잡는다. 현대적 자동 크로노그래프 개념 아래 완성한 칼리버 B01은 70시간 파워 리저브, 레드 존 없는 데이트 변경 같은 편의성, 크로노그래프 구동에서는 칼럼 휠과 버티컬 클러치 구조로 무장했다. 사용자 중심의 실용성과 생산의 용이함까지 고려한 칼리버 B01은 빠른 속도로 범용 무브먼트를 대체하며 브라이틀링을 매뉴팩처로 변신시켰다. 칼리버 B01을 장착하고 내비타이머 특유의 디테일을 이어받은 이 모델은 Ref. 806 이후 가장 완성도 높은 내비타이머로 자리 잡았다.



브라이틀링 크로노맷 B01 42

브라이틀링 크로노맷 B01 42
브라이틀링 크로노맷 B01 42

크로노맷은 크로노그래프 포 매더매틱스(Chronograph for Mathematics)에서 ‘chrono’와 ‘mat’을 따온 작명이다. 1940년대 오리지널 버전에 슬라이드 룰을 장착해 사칙연산 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래했다. 크로노맷의 핵심적 기능이자 상징인 슬라이드 룰이 내비타이머에서 자리 잡자 크로노맷은 1980년대에 형태를 바꿔 등장한다. 이때 출시된 Ref. 81950은 슬라이드 룰이 없는 크로노그래프였다. 대신 회전하는 베젤에 라이더 탭이라 부르는 15분 단위로 돌출된 블록을 넣어 쿼터 단위의 위치를 (장갑 낀) 손으로 더듬어 확인할 수 있었다. 또 15분과 45분의 블록을 교체하면 크로노그래프를 카운트업에서 카운트다운으로 변경할 수도 있었다. 이후 Ref. 81950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스피드 브레이슬릿 같은 디테일을 갖춘 크로노맷 에볼루션(2004년)과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를 적용한 크로노맷 B01(2009년 당시의 모델명, 이후 크로노맷 44)로 진화한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를 최초로 탑재하며 브랜드를 대표했지만, 파일럿 워치의 정체성 측면에서는 다소 모호했다. 300m까지 향상된 방수 성능과 다이버 워치와 같은 회전 베젤을 갖춰 올라운드 스포츠 워치에 가까워진 형태가 이를 말해주었다. 최근 크로노맷은 잠시 라인업에서 이탈했다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Ref. 81950의 형태를 그대로 계승했고, 사라졌던 롤(Rouleaux) 브레이슬릿을 다시 들고 나왔다. 바 형태의 링크를 연속으로 연결한 롤 브레이슬릿과 오리지널 Ref. 81950에 더욱 가까워진 디테일은 크로노맷의 정체성을 다시 확고히 했다. 새로운 크로노맷은 다채로운 다이얼 컬러를 적용하며 과거 소재와 컬러를 이용한 조합의 묘미를 보여줬던 크로노맷의 다양성 또한 되살려냈다.


브라이틀링 롤 브레이슬릿
브라이틀링 롤 브레이슬릿


GMT 마스터의 탄생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GMT 마스터 II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GMT 마스터 II

1954년은 롤렉스의 GMT 마스터가 등장한 해다. GMT 마스터는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진 팬암(Pan Am) 항공의 의뢰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론진의 아워 앵글 워치나 브라이틀링의 내비타이머처럼 직접적으로 비행(항법)에 도움을 주는 기능은 없다. 이들 시계와 비교한다면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다. 사실 GMT 마스터는 파일럿 워치라기보다 GMT 워치의 전형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시간과 날짜 기능에 GMT 기능을 추가적으로 갖춘 모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일럿 워치라는 장르적 관점에서 볼 때 GMT 마스터는 같은 장르의 시계라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제트엔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발전을 이룬 전자항법 분야의 영향이 파일럿 워치에도 변화를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다. 제트엔진 덕분에 빠른 속도로 장거리 비행을 할 수 있게 되자 파일럿은 여러 타임존을 빠르게 넘나들었고, 출발지와 도착지의 로컬 타임(타임존)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이 점에 착안해 탄생한 시계가 GMT 마스터다. 24시간을 새긴 회전 베젤, 24시간 표시의 GMT 핸드를 이용해 2개의 타임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GMT 마스터의 후속 모델로 GMT 마스터 II가 등장했고, 하나의 타임존을 더 확인할 수 있도록 기능 면에서 진보를 이루었다. 단종된 구형 GMT 마스터 II에 동봉된 북클릿 표지는 비행기 콕핏 속과 파일럿의 뒷모습, 파일럿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GMT 마스터의 탄생 배경을 말해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우주로 향한 파일럿 워치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코-액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크로노그래프 42MM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코-액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크로노그래프 42MM

인류의 커다란 업적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첫 달 착륙은 냉전 시대였던 1969년에 이루어졌다. 미지의 우주 공간에서 정확한 시간 확인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나사는 공개 입찰을 통해 달로 향할 시계를 찾았다. 롤렉스를 포함한 몇몇 브랜드가 입찰에 참여했는데, 최종 승자는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였다. 스피드마스터는 원래 파일럿 워치를 목표로 탄생한 모델이 아니다. 스피드를 이름에 넣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레이싱 크로노그래프를 목표로 삼았으나, 나사의 공식 테스트를 통과하며 우주 파일럿 워치의 자리를 획득했다. 스피드마스터는 1969년 7월 20일, 달 착륙선 파일럿 버즈 올드린(Buzz Aldrin)과 함께 처음으로 달 표면을 밟는다. 이후 스피드마스터라는 이름 대신 문워치로 불리게 되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문워치라 부른다. 달 착륙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역사의 승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우주를 경험하고 온 다른 시계도 적지 않다. 먼저 달에 가는 데는 실패했지만 처음으로 우주를 경험한 소련의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착용한 이름 없는 시계, 브라이틀링의 코스모넛 내비타이머 같은 모델도 있었다. 코스모넛 내비타이머는 우주에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한 모델이다. 기본 형태는 내비타이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12시간이 아닌 24시간 표시 방식을 택했다.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상정한 기능이었다. 24시간을 표시하는 다른 파일럿 워치로는 글리신의 에어맨이 있다. 에어맨은 군용으로 정식 납품된 역사는 없지만 기능성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군 파일럿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오메가 4세대 스타일에서 영감받은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달 표면을 밟은 순간 스피드마스터(문워치 프로페셔널)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스피드마스터라는 이름은 지상의 시계를 뜻했지만, 달을 밟고 나서는 우주의 시계가 된 것이다. 우주 비행사가 착용한 크로노그래프라서 파일럿 워치라 부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파일럿 크로노그래프 장르에 속한 다른 모델과 비교했을 때 부족한 요소는 없는 듯하다. 굳이 꼽는다면 세밀한 다이얼 인덱스 구성에 따른 가독성 저하다. 아폴로 13호가 임무 수행 도중 산소 탱크가 폭발해 지구로 귀환해야 했을 때 14초 동안 정확하게 연료를 연소해야 하는 임무를 스피드마스터가 훌륭히 수행한 점을 본다면 이마저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이런 실제적 경험을 한 파일럿 크로노그래프는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은 최근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4세대 디자인에 기반한 외관은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링크가 작은 브레이슬릿으로 교체해 편안한 착용감을 갖췄다. 무브먼트는 칼리버 1861에서 3861로 수정되었고 칼리버 1861을 베이스로 오메가의 라인업 전반에 투입한 실리시움 기술을 적용했다. 전반적으로 성능적 향상을 이끌어내며 세대교체에 어울리는 상품성의 개선을 이뤄냈다. 아울러 수동 크로노그래프라는 점에서 가격대 대비 유일한 선택지라는 점, 우주 비행사가 착용했다는 스토리라인은 여느 파일럿 워치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강점일 듯하다.



파일럿 워치의 현재

브라이틀링 이머전시
브라이틀링 이머전시

항공, 항법 기술의 발전은 자연스레 파일럿 워치를 퇴역시켰다. 그렇지만 파일럿 워치의 매력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파일럿 워치라는 장르가 구축되고 지금까지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능성과 이에 기반한 디자인 덕분이다. 기계식 시계는 1969년 쿼츠 손목시계의 직격을 받고 부활한 이래 기능성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 무렵의 파일럿 워치 또한 실용성과 기능성 측면에서 방황해야 했다. 최근의 파일럿 워치는 내자성능 같은 전통적 기능성에서 떠나 일상적 기능성으로 들어왔다. 파일럿 워치 브랜드들이 고집스레 고수하던 솔리드 백 대신 시스루 백으로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고, 스트랩도 손쉽게 교체하도록 하고 있다. 더 이상 파일럿 워치는 파일럿만의 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일럿 워치의 생명력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파일럿 워치라는 장르를 구축하게끔 이어진 역사, 개성적인 디테일과 디자인은 파일럿 워치를 존재하게 할 끝없는 원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