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파일럿 워치에서 럭셔리 스포츠 워치로

IWC Schaffhausen Pilot’s Watch

 
1940 big pilot watch 52 T.S.C
1940년 빅 파일럿 워치 52 T.S.C

감독 IWC, 출연 빅 파일럿


시계 장르의 일반적 구분 기준은 ‘용도’다. 물론 ‘시간을 확인한다’는 본질적 용도는 모두 같다. 결정적인 변별점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 시간을 확인하느냐는 것이다. 사용 환경이 워치메이커의 아이디어와 만나 시계의 역사가 만들어지고 하나의 장르가 탄생한다. 디자인 역시 용도에 부합하기 위해 기능성을 극단까지 추구한 결과물이다. 예컨대 다이버 워치의 높은 방수 기능과 역회전 방지 베젤, 야광 인덱스는 1950년대 급증한 민간 다이버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파일럿 워치 역시 기능과 디자인에서 탄생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파일럿 워치는 비행중에도 시간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검은색 다이얼에 흰색 아라비아숫자 인덱스를 적용했다. 크라운은 장갑을 착용하고도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컸으며, 야간에도 시간 확인이 가능하도록 인덱스와 핸즈에 야광 물질을 발랐다. 어떤 파일럿 워치에는 스몰 세컨드가 아닌 센터 세컨드를 적용했는데, 이 또한 속도가 빠른 항공기의 특성상 초 단위 시간을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무브먼트 설계 변경이었다. 파일럿 워치라는 장르는 이러한 기능적 요소가 결합된 구조체 이며, 하늘을 날고싶은 인간의 꿈도 함께 담겨있다. 이 장르에 여러 감독이 뛰어들었으나 가장 유명한 감독은 IWC였고, 주인공 역할은 빅 파일럿이 맡았다.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이었다.



독일군 항공 관측 시계, B-Uhr


파일럿 워치는 손목시계 역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다. 주머니 속 회중시계가 손목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일종의 ‘강제성’이 작동했다. 즉 손목에 시계를 착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결정적이었다. 전쟁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 등이 바로 그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널리 확산된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중요한 군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독일 공군은 파일럿들에게 지급할 손목시계 제작을 몇몇 시계 제조사에 의뢰했다. 당시 독일 공군에서 사용했던 시계를 항공 관측 시계(Beobachtungs-Uhren)라고 하며, 흔히 ‘B-Uhr’로 표기한다. B-Uhr의 제조사는 랑에 운트 죄네, 슈토바, 라코, 벰페 같은 독일 시계 브랜드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스위스 제조사 한 곳이 납품 업체로 선정되었는데, 바로 IWC 샤프하우젠이었다. IWC는 이미 1936년 브랜드 최초의 파일럿 워치를 출시했다. 민간 항공용으로 제작된 이 시계는 온도 변화에 강한 항자기성 시계였고, 큼직한 아라비아숫자 인덱스와 이륙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회전 베젤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제작 노하우를 기반으로 IWC는 1940년 독일 공군을 위한 빅 파일럿 워치 52 T.S.C.(Ref. 431)를 개발했다. 회중시계용 수동 칼리버를 사용한 지름 55mm의 이 시계는 압도적인 크기때문에 훗날 ‘빅파일럿’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big pilot's watch 2002
2002년 빅 파일럿 워치


독일혈통vs영국혈통

IWC는 2002년 빅 파일럿 워치를 부활시켰다. 새로운 빅 파일럿 워치(Ref. 5002)는 과거 1940년 오리지널 모델의 디자인을 빠짐없이 계승했다. 다만 케이스 지름은 46.2mm로 줄였고(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컸지만), IWC를 대표하는 칼리버 5011을 장착해 7일간의 파워 리저브를 보장했다. 시원하게 뻗은 소드 핸즈와 커다란 크라운은 존재감을 드러냈고, 오버사이즈 시계의 유행과 더불어 빅 파일럿은 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IWC는 기존의 마크 시리즈와 빅파일럿을 중심으로 파일럿 워치 컬렉션을 꾸려 해당 장르를 럭셔리 워치 영역에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빅 파일럿이 독일군 시계의 혈통이라면, 마크 시리즈는 영국군 시계의 계보를 잇는다. 1944년 IWC는 영국 육군의 요청으로 방수 손목시계(마크 10)를 납품했고, 1948년에는 영국 공군을 위해 마크 11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파일럿 워치를 1994년 ‘마크 12’라는 이름으로 복각했다. 그해 IWC는 마크 시리즈의 디자인을 공유하는 크로노그래프 모델 (Ref. 3706)도 함께 선보였는데, 이 시계가 오늘날 파일럿 크로노그래프의 시초다. 그리고 올해 IWC는 독일 출신의 빅 파일럿과 영국 출신의 파일럿 크로노그래프를 대대적으로 리뉴얼했다. 둘 다 모델명 뒤에 전에 없던 숫자가 붙었다. 빅 파일럿은 ‘43’,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는 ‘41’이다.


2021 big pilot's watch 43
2021년 빅 파일럿 워치 43


대중성을 향한 원점 회귀

새로운 빅 파일럿 43은 1940년 원래 디자인으로 되돌아갔다.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와 데이트 창이 사라지고, 심플한 논데이트 시계가 되었다. 반면 사이즈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케이스 지름은 43mm다. 이제야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도 부담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적절한 수준에서 잘 타협했다. 대체품인 마크 시리즈가 있기도 하거니와 이보다 더 작으면 ‘빅’ 파일럿 느낌이 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무브먼트가 82100으로 바뀌면서 파워 리저브는 7일에서 60시간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효율성 높은 펠라톤 와 인딩 시스템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가격이 낮아지면서 접근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롱 파워 리저브가 오버 스펙인 사람에게는 환영할 일이다. 칼리버 82100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을 제공한다. 사실 IWC는 엔트리 모델과 상위 모델의 무브먼트 격차가 큰 편이었다. 82100은 이 둘을 이어주는 무브먼트로 손색이 없다. 실제로 주력 컬렉션인 포르투기저 오토매틱 40에도 스몰 세컨드 버전인 칼리버 82200이 활약중이다. 블랙과 블루 다이얼로 출시되었는데, 블루 다이얼의 경우 선버스트 피니싱 을 적용했다. 색감과 마감이 훌륭해서 논데이트 다이얼의 다소 넓은 공백이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된다. 아라비아숫자 인덱스를 모두 야광 처리한 것도 좋다.


2021 big pilot's watch 41
2021년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


다양한 스트랩을 교체하는 재미


함께 출시된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도 케이스 지름이 43mm에서 41mm로 줄어들었다. 두께와 무게는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항공기 계기판을 연상시키는 크로노그래프 다이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붉은색 스몰 세컨드의 위치는 9시에서 6시로 이동했다. 새로운 무브먼트 69385를 장착했기 때문인데, 이는 기존 스핏파이어 크로노그래프 모델에 이미 적용 되었고, 올해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 모델에도 적용되었다. 칼럼 휠과 수평 클러치를 사용했으며, 파워 리저브는 60시간 정도다. 이번 빅 파일럿 43과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의 놀라운 변화는 스트랩에서도 발견된다. 새로운 이즈X-체인지(EasX-CHANGE) 시스템으로 브레이슬릿과 가죽·러버 스트랩을 손쉽게 교체할 수 있다. 러그 체결 부위는 물론, 디버클까지 말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빅 파일럿 라인업에는 브레이슬릿이라는 선택지가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추가되면서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필수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켰다. 여기에 방수 성능을 100m로 늘리고, 별도의 러버 스트랩까지 준비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비슷한 디자인의 청판 스포츠 워치에 싫증난 사람이라면 이번 빅 파일럿 43과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41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



파일럿 워치의 출발점이자 종착점

IWC의 파일럿 워치는 최고의 입문용 파일럿 워치이자 현실적인 종착지이기도 하다. 물론 이보다 값비싼 파일럿 워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브랜드라도 IWC만큼 파일럿 워치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잘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흔히 정통성을 부각하는 시계는 자기 고집이 강하다. 내가 기준점이니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 하지만 이번 IWC의 파일럿 워치는 다르다. 더이상 정통 파일럿 워치만 고집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과 분위기는 유지하되 사이즈를 줄이고 편의성을 더해 일상생활에서 언제든 착용할 수 있는 럭셔리 스포츠 워치를 지향한다. 파일럿 워치 특유의 항자성 연철 케이스 백을 버리고, 시스루 백으로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보다 대중 지향적인 설정이다. 이제 모든 비행 준비는 끝났다. 손목을 향해 스로틀을 당기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