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할 가치가 있는 살아 있는 유산, 안티노리
- bhyeom
- 7월 7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14일
Antinori a living legacy to be collected
와인은 오직 포도 한 가지 재료만으로 빚어진다. 그래서 그 한 잔에는 기후, 토양, 그리고 시간이 담긴다. 26대째 와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마르케시 안티노리(Marchesi Antinori)의 약 650년 여정을 음미하는 자리가 2025년 6월 12일, 서울 남산이 바라다보이는 한강 위 세빛섬 ‘무드서울’에서 열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에서 시작된 안티노리는 지금도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신뢰를 받는 살아 있는 전통이다.

안티노리는 이탈리아 전역의 16개 와이너리를 비롯해 미국, 칠레, 헝가리 등 세계 곳곳에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글로벌 와인 가문이다. 단 한 번도 가업이 끊긴 적 없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 경영 와인 회사 중 하나다. 이러한 전통과 규모를 입증하듯 ‘안티노리로의 여정’ 시음회는 30여 종의 프리미엄 와인을 한자리에 선보이며 120석 전석을 매진시켰다. 테이스팅의 시작은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 지역의 화이트 와인 명가 예르만(Jermann)의 피노 그리지오였다. 드라이한 특성에 벨벳 같은 부드러운 질감이 조화를 이루며, 풀보디 구조와 풍부한 과실 향이 인상 깊게 펼쳐졌다.
뒤이은 체르바로(Cervaro)는 샤르도네와 그레케토를 블렌딩한 와인으로, 산뜻한 시트러스와 달콤한 바닐라, 고소한 너트, 미네랄 향이 우아하게 펼쳐지며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의 깊이를 전했다. 중심에는 역시 안티노리 전통과 혁신을 상징하는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인 티냐넬로(Tignanello)와 솔라이아(Solaia)가 자리했다. 티냐넬로는 산조베세를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과 블렌딩한 구조감 있는 와인으로, 체리와 말린 허브, 그리고 부드러운 오크 터치가 어우러져 탁월한 균형미를 보여주었다. ‘태양을 담은 언덕’이라는 뜻의 솔라이아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축으로 한 슈퍼 투스칸으로, 블랙베리, 스파이스, 다크 초콜릿 향이 입안에서 풍성하게 퍼진다.
이날 라인업에는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프랑스 보르도 그랑 크뤼를 제치고 1위에 선정, 나파밸리를 세계 무대에 올린 전설적 브랜드, 미국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Stag’s Leap Wine Cellars)가 함께했다. 현재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미국을 만든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만큼, 시대를 바꾼 상징적인 와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시음회는 와인 테이스팅을 넘어, 한 브랜드가 품은 시간과 철학, 그리고 문화적 유산을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안티노리는 어떻게 650년간 와인으로 살아남았을까?

르네상스 시대에서 슈퍼 투스칸까지, 살아 있는 시간의 연대기 1385년,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던 시절, 조반니 디 피에로 안티노리(Giovanni di Piero Antinori)가 피렌체 와인 길드에 등록하며 안티노리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피에로 안티노리(Piero Antinori)는 안티노리 가문의 25대 후작으로, 이탈리아 와인의 전환점을 만든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통 품종 산조베세에 카베르네 소비뇽을 블렌딩한 새로운 와인인 티냐넬로를 1970년에 선보인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와인 생산 규정을 벗어났기에 최하위 등급이 부여됐지만, 결과는 와인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슈퍼 투스칸’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열리고, 1978년의 솔라이아까지 더해지며 안티노리는 전 세계에 ‘이탈리아 와인의 재탄생’을 알렸다.
이러한 혁신적 가치는 기업가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역시 티냐넬로를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 임원 선물로 건넸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2000년, <와인 스펙테이터>는 솔라이아 1997 빈티지를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했다. 단순한 희소성을 넘어 안티노리의 와인은 시간과 전통, 그리고 혁신이 응축된 결정체다. 그리고 이러한 가문의 운영 철학은 26대째로 이어지며 현재는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의 세 딸이 경영을 승계하고 있다. 브랜드 전략과 마케팅을 맡은 장녀 알비에라, 와인 생산과 품질관리를 책임지는 차녀 알레그라, 재무와 경영 관리를 담당하는 막내 알레시아는 각기 다른 역할을 통해 안티노리의 철학을 다음 세대로 확장하고 있다. 품질과 전통에 대한 집념으로 이탈리아 와인의 위상을 새롭게 만든 아버지의 정신을 바탕으로 안티노리 가문의 가족적 리더십은 650년 동안 ‘유산의 지속 가능성’을 실현해온 상징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자연과 건축의 공존
자연 속에서 시간을 이어온 안티노리의 철학은 자연에 묻힌 와이너리의 형태로 구현된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안티노리 넬 키안티 클라시코(Antinori nel Chianti Classico)’는 언덕의 지형을 품은 지하형 와이너리다. 이탈리아 건축 스튜디오 아르케아 아소시아티(Archea Associati)가 설계하고 2012년 완공한 이 건축물은 포도밭으로 덮인 지붕 덕분에 언덕의 일부처럼 자연에 완벽히 녹아 있다. 이곳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질서를 따라가는 철학 아래 설계되었다. 포도는 최상층에서 투입되어 중력만으로 아래층까지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외부 기계 개입 없이 섬세하게 다뤄진다. 붉은 흙과 목재 등 지역 재료로 지은 건물은 자연 채광과 통풍만으로 실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지속 가능한 와인 생산을 실현하고 있다.
내부에는 와이너리 개관과 함께 시작된 현대미술 플랫폼 ‘안티노리 아트 프로젝트(Antinori Art Project)’를 비롯해 박물관, 도서관,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레스토랑까지 갖추어, 방문객은 와인뿐 아니라 토스카나의 예술과 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과 철학의 조화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영국 윌리엄 리드 미디어 그룹(William Reed Media Group)이 주관하고, 전 세계 700여 명의 와인 전문가, 여행 전문 기자, 소믈리에가 투표에 참여하는 ‘월드 베스트 빈야드(World’s Best Vineyards)’ 시상식에서 2022년 세계 1위에 선정되며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안티노리 와이너리는 건축 미학, 자연경관, 미식 경험, 문화 콘텐츠를 아우르며 와이너리 방문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수집의 기준, 가치의 조건
와인을 수집하거나 자산으로 접근할 때 중요한 기준은 브랜드의 신뢰도, 희소성, 그리고 시장성이다. 이 세 요소를 고루 갖춘 브랜드는 드물지만, 안티노리는 그 대표적인 예다. 사브서울 권우 소믈리에는 와인을 “올바른 보관과 시간이 더해질수록 가치가 오르는 실물 자산”이라며, “단순한 술을 넘어 생애 주기를 지닌 문화적 수집품”이라고 말한다. 안티노리를 대표하는 티냐넬로는 슈퍼 투스칸의 상징으로, 10~20년간 숙성 가능한 구조감과 복합미를 지닌다. 빈티지에 따라 시장 가치가 급등하며, 시대적 와인 트렌드와 테루아가 함께 반영된 장기 보관형 와인이다. 솔라이아는 연간 약 3만 병만 생산되는 희소 와인으로, 낮은 생산량과 높은 평가 덕분에 수집가와 투자자의 주목을 받아왔다. 실제 경매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2024년 크리스티에서는 티냐넬로 1971 빈티지가 약 1,200달러, 소더비에서는 솔라이아 2015가 4,000달러에 낙찰됐다. 이는 소매가 대비 수십 배에 달하는 프리미엄으로, 안티노리 와인의 실질적 자산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전통을 넘어, 경험으로
최근 안티노리는 글로벌 와인 시장을 향해 과감히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21년 이탈리아 프리울리의 예르만, 2023년 미국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완전 인수의 확장도 단순한 규모 경쟁이 아니라, ‘전통을 지닌 자만이 혁신할 수 있다’는 안티노리 가문의 철학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이날 시음회에서 만난 안티노리 세일즈 마케팅 엑스퍼트 귀도 바누치(Guido Vannucch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와인은 우아하며, 열정이며, 전설입니다. 어떤 와인이 가장 좋은지는 정해진 답이 없어요. 어떤 음식과 같이 먹는가,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다르죠. 진정한 와인은 여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이러한 철학은 와인 수집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시계나 보석, 예술 작품과 달리 와인은 경험하는 순간 사라지는 컬렉션이다. 소유와 경험의 경계를 극적으로 넘나들며 누군가와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된다. 좋은 와인은 존재하지만, 위대한 와인은 기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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