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믹은 금속보다 따뜻하다, 라도 매뉴팩처
- bhyeom
- 3월 18일
- 4분 분량
‘소재의 마스터’가 연금술(鍊金術), 아니 연요술(鍊窯術)을 부리는 장소를 엿볼 기회가 생겼다. 워치스 & 원더스가 개최되고 있는 제네바에서 2시간 30분을 달려, 봉쿠르(Boncourt)에 위치한 라도(Rado)의 생산 시설에 도착했다. 바로 이곳 코마뒤르 SA(ComaDur SA)에서 라도 시계를 위한 하이테크 세라믹 부품이 생산된다.


캡틴 쿡 하이테크 세라믹 스켈레톤 올리브 그린
Ref. R32150162
지름 43mm
케이스 올리브 그린 하이테크 세라믹, 300m 방수
다이얼 그레이 스켈레톤
무브먼트 오토매틱 와인딩 R734, 80시간의 파워 리저브
스트랩 올리브 그린 하이테크 세라믹 브레이슬릿과 티타늄 클래스프
세라믹 하면 라도
라도는 에스페란토어로 ‘바퀴(wheel)’를 뜻한다. 언제부터 세라믹이 라도의 중요한 바큇살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됐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브랜드가 지난 100여 년 동안 거쳐온 여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7년 라도는 스위스 렝나우에서 프리츠·에른스트·베르너 슐럽 삼 형제가 슐럽 & 코(Schlup & Co.)라는 이름으로 출범시킨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시계 완제품보다 수동 무브먼트 조립에 집중하는 소규모 회사였다. 슐럽 & 코가 ‘라도’라는 자체 브랜드로 시계 완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1950년대의 라도를 대표하는 시계는 그린 호스(Green Horse). 이 시계의 성공은 글로벌 시계 시장에서 라도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1962년 라도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세계 최초로 ‘스크래치 방지’ 콘셉트를 내세운 다이아스타(DiaStar)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이아스타의 케이스 소재는 세라믹이 아니라 텅스텐 카바이드 기반의 하드 메탈이었다. 하지만 ‘긁히지 않는’ 소재에 대한 라도의 관심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라도는 다양한 형태의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시계에 선구적으로 도입했다. 아직 대다수 브랜드가 아크릴 크리스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결과 ‘에지 투 에지’ 사파이어 크리스털은 1970~1980년대 라도의 시그너처가 된다. 케이스의 양 측면부터 전면까지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덮는 에지 투 에지 디자인은 시계의 스크래치를 막아줬을 뿐만 아니라, 라도 시계 특유의 미래 지향적 디자인에 설득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드디어 브랜드 최초의 세라믹 시계 인테그랄(Integral)을 선보인다. 세계 최초로 케이스는 물론이고 브레이슬릿과 크라운까지 세라믹으로 제작한 사각 시계였다. 뒤이어 1990년에는 일체형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을 전면 하이테크 세라믹으로 제작한 새로운 사각 시계 세라미카(Ceramica)를 선보인다. 두 모델이 연이어 성공을 거둔 후, 하이테크 세라믹은 라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소재가 됐다. 하이테크 세라믹은 라도가 수십 년간의 소재 실험을 통해 찾은 최선의 소재다. 스크래치에 강하고, 가볍고, 편안하며, 알러지를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착용자가 느끼는 편리성과는 반대로 하이테크 세라믹은 제조사 입장에서 너무나도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다. 그 어떤 소재보다 오랜 기다림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송이 세라믹 꽃을 피우기 위해
세라믹이라면 그저 주형을 만들어 고열의 오븐에서 가열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생산 시설에서 직접 보니, 주형에 넣을 만한 피드 스톡(feedstock)을 만드는 것부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산화 지르코늄 파우더와 색상을 내는 염료, 그리고 매질이 될 액체를 넣고 재료를 골고루 섞는 작업이 필요하다. 염료와 파우더가 균일하게 섞이지 않으면 이후 공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재료들을 섞는 데만 만 하루가 소요된다고. 처음 들어간 염료의 색은 최종 완성품의 색과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라믹의 색상은 염료가 고온에서 어떤 화학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라도는 팔레트에 50개 가까운 색상을 확보했다고 한다. 액체 상태의 혼합물을 커다란 원뿔형 드라이어에 분사해 건조시키면 다시 파우더 형태가 된다. 여기에 폴리머 바인딩 수지를 섞어 반죽을 만든다. 이 반죽을 다시 갈아 낱알 형태로 만들고, 이 낱알들에 서서히 열을 가해 굵은 스파게티 같은 형태의 막대로 굳힌다. 이 막대를 균일한 크기로 자른 것이 주형에 들어가는 피드 스톡이다.
피드스톡에 열을 가해 페이스트 형태로 녹인 다음, 정확한 형태를 얻기위해 주형에 1000기압의 높은 압력으로 주입한다. 페이스트를 주형에 주입하는 데는 약 30초밖에 걸리지 않는데, 이 복잡한 공정에서 유일하게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사실은 주형 자체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소재가 수축되는 것을 감안해 주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케이스 시안으로부터 1년가량의 연구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형에서 나온 부품도 바로 구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코올에 넣고 하루 정도 방치해야 폴리머가 용출되고, 미세한 구멍이 촘촘하게 난 부품 원형이 만들어진다. 이 원형을 1,450℃ 오븐에 넣어 가열하는데, 이 가열 작업 역시 2~3일 걸린다. 가열된 부품 원형은 부피가 점점 줄어들면서 구멍들이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수축률은 평균 23% 정도지만, 형태에 따라 축소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꼼꼼한 사전 예측 작업이 필수다. 나사산이나 핀이 들어가는 홈 등 정밀한 부분도 수축 이후 크기를 미리 계산해둬야 한다. 사각 케이스에 사각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접착 없이 조립해 넣을 정도로 정밀한 계산이 가능한 브랜드는 지금도 라도뿐이라고.

세라믹 가공 기술의 정점
그다음 과정은 머신 가공이다. 단단한 다이아몬드 팁을 사용해 부품을 가공해 원래 의도대로 정확한 형태를 얻게 된다. 원리는 CNC 머신과 유사하지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일반적인 스테인리스 스틸이면 3분 정도면 완료할 수 있는 작업도 세라믹에는 1시간가량 소요된다. 마지막 단계는 피니싱이다. 단단한 하이테크 세라믹에 피니싱을 가할 수 있는 건 같은 세라믹 소재의 연마제뿐이다. 용기 속에 세라믹 연마제와 부품을 함께 넣고 진동을 이용해 표면을 연마한다. 사용한 염료의 종류에 따라 세라믹의 경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부품의 색에 따라 폴리싱에 걸리는 시간이 달라진다. 신기하게도 광택이 없는 매트 세라믹은 폴리싱 과정 이후 따로 샌드 블라스트하는 공정을 거친다. 라도만의 특기인 ‘플라스마 하이테크 세라믹’을 만들기 위해선 여기에 추가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흰색 세라믹을 20,000℃ 정도까지 올라가는 플라스마 오븐에 넣는 것이다. 20,000℃가 얼마나 높은 온도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비교를 해보자. 용암 온도가 보통 800~1,200℃ 정도이고, 지구의 내핵 온도가 5,400℃, 태양 표면의 온도가 약 5,800℃다. 플라스마 오븐에서 나오면 세라믹은 마치 액체 금속 같은 매끈한 광택과 독특한 색감을 얻게 된다. 물론이 광택과 색감은 하이테크 세라믹 소재에 뭔가를 입혀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소재 자체를 높은 온도를 통해 구조적으로 변화시켜 얻은 것이다. 따라서 긁히거나 벗어질 염려가 전혀 없다. 플라스마 오븐은 전 세계에 10개 정도가 있는데 대부분 의료 분야나 자동차 엔진 등에 활용되고, 워치메이킹에서 활용하는 건 라도뿐이다. 봉쿠르에서 확보하고 있는 플라스마 오븐은 2개로, 연내에 세 번째 오븐을 들일 예정이라고.

트루 스퀘어 오토매틱 오픈하트
Ref. R27176712
지름 38mm
케이스 터쿼이즈 하이테크 세라믹, 50m 방수
다이얼 12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스켈레톤
무브먼트 오토매틱 와인딩 R734, 80시간의 파워 리저브
스트랩 터쿼이즈 하이테크 세라믹 브레이슬릿과 티타늄 클래스프
라도의 소재 실험은 끝나지 않는다
매뉴팩처를 둘러보고 난 다음 출시 예정 모델들을 잠시 살펴볼 수 있었다. 세라믹은 색상과 소재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터프하거나 중후한 오라를 풍길 수 있고,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라도는 다양한 색상의 세라믹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다양한 컬러 팔레트를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활용할 예정이다. 올여름과 하반기를 기대해도 좋겠다. 이미 라도는 올해 캡틴 쿡 하이테크 세라믹 라인에 ‘올리브 그린’ 색상의 세라믹을 적용한바 있고, 최근 출시된 트루 스퀘어 오픈하트에서는 ‘터쿼이즈’ 색상을 보여준바 있다.
라도가 하이테크 세라믹 시계 하나를 만드는 데는 최소 3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최첨단 시설도 필요하지만, 사람의 손도 많이 가는 프로세스다. 그동안 세라믹 시계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긁히지 않는 단단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건 인고의 시간이었다. 세라믹이 금속보다 따뜻한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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