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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HYT, SOONOW

 
순나우 그린 플루이드
순나우 그린 플루이드


물시계를 손목시계로 구현하다


시계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붙잡아둔 기호다. 초침과 분침으로 ‘현재’를 표시하지만 그것은 늘 ‘과거’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런 점에서 고대인들이 흐르는 물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물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둬서 표시할 뿐만 아니라 끝없이 흐르는 시간의 유동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원시적인 시계가 오히려 시간의 본질을 가장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HYT는 이러한 물시계를 손목시계로 구현한 독립 시계 브랜드로, 액체를 이용해 시간을 표시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활용한다.

2002년 무렵, HYT의 창립자 뤼시앵 부이라모즈(Lucien Vouillamoz)는 고대 그리스의 물시계 클렙시드라(Klepsydra)를 손목시계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 엉뚱 한 상상에 꽤 많은 사람이 동참하면서 오늘날 HYT의 독특한 시계가 탄생하게 되었다. HYT는 과거의 물시계에서 받은 영감을 현재의 첨단 기술로 구현했다. 특히 나사 (NASA) 협력사 프레시플렉스(Preciflex)에서 개발한 리퀴드 디스플레이 메커니즘과 이를 구동하는 피스톤 파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HYT는 설립한 후 약 10년 동안 연구 개발을 거쳐 2012년 첫 시계 H1을 발표했고, 그해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 이노베이션 워치 부문에 선정되었다. 순나우(SOONOW)는 H1에 적용한 유체 모듈 메커니즘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아트피스다.


H1
H1
H1


기계식 무브먼트와 유체 모듈 장치의 결합


HYT의 무브먼트는 크게 기계식 모듈과 액체로 시간을 표시하는 유체 모듈로 나뉜다. 시계 뒷면을 보면 상단에는 배럴, 기어트레인, 밸런스 휠 등 익숙한 부품이 보인다. 태엽을 감아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과정은 일반 기계식 시계와 동일하다. 차이점은 이렇게 확보한 힘으로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기존 시계는 기어트레인의 회전운동으로 초침·분침·시침을 움직여 시간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 시계는 기계식 무브먼트에서 얻은 힘으로 ‘벨로즈(bellows)’라는 유체 모듈 장치를 구동시킨다. 기계식 무브먼트 아래에 마치 자동차 엔진처럼 생긴 2개의 피스톤 장치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벨로즈다. 2개의 피스톤에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액체가 들어있고, 작고 가는 유리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유리관 내부에는 액체가 묻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0회 이상 나노 코팅 처리를 했다. 기계식 무브먼트에는 회전운동을 직선운동으로 바꿔주는 캠을 설치해, 시간이 흐를 때마다 벨로즈에 일정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압력이 가해지면 피스톤 내부에 있던 투명한 액체가 반대편 피스톤으로 초록색 액체를 밀어낸다. 말 그대로 시간이 물처럼 흐르는 셈이다.


시간을 확인하려면 투명한 액체와 초록색 액체의 경계에 있는 영문 숫자를 읽으면 된다. 순나우는 분침이 없기 때문에 대략적인 시간만 추정할 수 있다. 사실정확한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표현하는 독특한 메커니즘이다. 이 시계는 두 종류의 액체로 시간의 유동성과 함께 현재 시간을 표현한다. 투명한 액체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시간이다. 초록색 액체는 앞으로 곧(soon) 다가올 미래의 시 간이다. 현재(now) 시간은 두 액체의 경계에 존재한다. 일반적인 시계는 현재의 시간을 물리적인 도구(주로 핸즈)로 지시한다. 반면 이 시계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를 통해 현재를 드러낸다. 이 근원적인 차이는 사용자가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흐름에 모두 존재하며, HYT는 이 개념을 유체 모듈 기술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즉 HYT의 기술적 성취는 미학적 성취이자 철학적 성취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물시계
고대 그리스의 물시계


시간을 되짚어보는 30초의 여유


작동방법은 다른 기계식 시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크라운을 1단 위치로 당겨서 돌리면 초록색 액체가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사실은 투명한 액체가 밀어내는 것이다). 기계식 무브먼트의 힘을 피스톤에 전달하고, 그 압력으로 다시 액체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아무래도 움직임에 시차가 느껴진다. 게다가 시간을 조정할 때는 크라운을 천천히 작동시켜야 유체 모듈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고대인의 여유가 필요한 순간이다.

이 시계에서 가장 극적인 시간대는 6시다. 6시 방향 양쪽으로 2개의 ‘six’ 인덱스가 있는데, 초록색 액체가 오른쪽 6시 근처에 도착하면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흘러온 길로 천천히 되돌아간다. 일종의 시각적 리셋이다(시간은 H0 블랙 플루이드 리셋 없이 계속 흘러간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초 정 도. 왼쪽 하단의 6시 방향까지 이동하면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오른쪽 6시를 향해 액체가 흐르기 시작한다(6시 30초 정도에서 다시 작동하는 셈이다). 언어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실제 시계를 작동시켜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6시 방향 유리관의 끊어진 부분을 건너뛰는 ‘점핑’ 기능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액체가 원래 위치로 되돌아가는 메커니즘은 그 자체로 시각적 재미를 주지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사용자에게 흘려보내기도 한다. 액체가 되돌아가는 30초 정도의 시간은 흘러온 12시간을 잠시나마 되짚어보는 순간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고 언젠가 끝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액체의 흐름으로 표현되는 시간은 단지 새롭고 독특한 것을 넘어 시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H0 블랙 플루이드
H0 블랙 플루이드


예술과 과학의 합작품


유체 모듈 장치가 만들어내는 시간의 다양한 의미는 순나우 모델의 해골 형상과 만나면서 보다 구체화된다. HYT는 H1, H2에 이어 2015년 해골 형상의 시계 ‘스컬(Skull)’을 발표했다. 그리고 2019년 이 시계를 다시 ‘순나우’로 리뉴얼 했다. H1에서 원형이던 유리관을 해골 형태로 변주했고, 왼쪽 눈에 세컨즈 디스플레이, 오른쪽 눈에 파워 리저브 디스플레이를 담았다. HYT는 이 시계를 ‘예술과 과학의 합작품’이라고 소개한다. 고대 아즈텍 유물과 현대 회화·조각 등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이얼 곳곳에서 그런 예술의 흔적이 느껴진 다. 중앙에는 총 313개의 18K 골드 핀으로 해골 이미지를 표현했다. 유리관 바깥쪽에는 937개의 작은 구멍을 뚫었는데, 튀어나온 골드 핀과 절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다이얼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측면까지 연결된다. 전면 다이얼의 규칙적인 배열과 달리 측면의 타공은 불규칙하다. 이는 각 시간대의 숫자를 영문으로 적은 것인데, 여간해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시인성보다는 디자인을 위한 설정이다. 이처럼 다이얼의 미세한 구멍은 시계 전체를 관통하는 디 자인 요소이며, 크라운과 러버 스트랩까지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렇게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시계들은 대체로 실착용이 부담스럽거나 불 편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HYT의 순나우는 실생활에서 착용하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다. 케이스 지름은 48.8mm로 큰 편이지만 러그 없이 케이스에서 바로 스트랩이 연결되는 구조라 실제 크기는 그보다 작게 느껴진다. 20.08mm의 두께는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나 거대한 돔 글라스 덕분에 상쇄되는 측면이 있다. 순나우는 케이스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지 않다. 다이얼 전면은 물론 측면까지 거대한 돔 글라스로 덮인 까닭이다. 이는 시계 측면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개방감을 선사한다. 방수 성능은 50m 정도로 약하지만, 스크루 다운 방식의 크라운이라 다양한 스포츠 활동시에도 활약할 수 있을것 같다. 파워 리저브는 약 65시간이다.


H2.0 무브먼트
H2.0 무브먼트


메멘토 모리!


해골은 중세 예술에서 자주 사용하던 소재로, 죽음과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순나우의 해골을 보면 유명한 라틴어 구절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가 떠오른다. ‘네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시간은 유한하며 우리는 죽음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존재다. 선명한 초록색 해골 형상은 연결되지 않은 채 시작과 끝이 있는 유리관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투명해진다.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희미하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우리는 현재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현재를 놓치고 있다. 순나우는 과거와 미래, 해골의 형상, 30초의 되돌림 등을 통해 바로 지금(Soon Now)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분침마저 생략해 시간을 확인하기 어려운 설정이 비로소 이해된다.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 정확한 시간은 불필요하다. 소설가 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집에서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 시계는 행복을 위해 우리가 어떤 태도로 시간의 흐름을 마주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첨단 기술의 결정체다.



순나우 인스턴트 레인보우

순나우 인스턴트 레인보우 Ref. H02513

지름 48.8mm

케이스 블랙 DLC 코팅 스테인리스 스틸,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 백, 50m 방수

무브먼트 매뉴얼 와인딩 메캐니컬 무브먼트

기능 유체 모듈 시간 표시, 초,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

다이얼 티타늄 중앙 다이얼, 313개의 18K 골드 핀, 668개의 스톤 세팅 사이드 다이얼

스트랩 블랙 러버 스트랩, 블랙 DLC 코팅 티타늄 폴딩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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