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적 인간의 기계식 시계들

Game & Watch

 
RJ 문 인베이더 테트리스-DNA(L)
RJ 문 인베이더 테트리스-DNA(L)


놀이하는 인간과 럭셔리 워치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로 정의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과 문화가 결국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놀이는 실용적 목적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완전히 독립된 자유로운 행위다. 또 놀이에는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며, 사람들을 몰입하도록 만든다. 럭셔리 워치를 소비 하는 것도 이러한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시계는 시간을 확인 한다는 실용적 목적에서 비켜서 있다. 그보다는 제품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다. 우리는 시계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브랜드의 꿈과 이야기를 공유한다. 흔히 손목시계를 ‘남자들의 장난감’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시계의 유희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몇몇 타임피스는 놀이 자체를 제품의 테마로 활용하기도 한다. 보드게임부터 비디오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시계들이다.



1980년대 아케이드 키즈를 위한 헌사


기계식 시계 애호가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비디오게임 워치는 RJ(로맹 제 롬)에서 출시한 일련의 게임 관련 제품이다. RJ는 2012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시작으로 팩맨, 테트리스, 슈퍼마리오, 동키콩 등 비디오게임 여명기의 명작을 다이얼에 담았다. 이 색다른 컬래버레이션은 RJ의 문 인베이더(Moon Invader) 컬렉션에 기반을 두고 있다. 46mm의 쿠션형 블랙 PVD 스틸 케이스는 달 착륙선을 닮았는데, 베젤에서 뻗어나간 4개의 다리가 케이스 백 부분에서 러그 기능을 수행한다. 또 문 인베이더에는 아폴로11호 예비 부품에서 가 져온 메탈 파츠를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우주를 모티브로 한 시계다.


RJ는 여기에 보다 특별한 스토리를 담고자 했으며, ‘스페이스 인베이더’라 는 역사적인 슈팅게임과 손을 잡았다. 이 게임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라는 테마와 긴장감 넘치는 게임 디자인으로 1980년대 비디오게임의 황금기를 열었다. 다이얼에는 게임 속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우주에서 온 ‘귀여운’ 침입 자들과 이를 저지하는 레이저 발사대를 픽셀 그래픽으로 표현한 뒤 특수 래커로 채색했다. 무브먼트는 4Hz 진동에 42시간 파워 리저브를 갖춘 인하우스 자동 RJ001-A 칼리버를 장착했으며, 러버 스트랩을 적용했다. 인베이더로 시작 된 RJ의 비디오게임 컬래버레이션은 이후 팩맨, 슈퍼마리오 등 다양한 게임으로 이어졌다. 같은 게임이라도 다양한 버전으로 출시했는데, 팩맨의 경우 각 버전을 레벨 1·2·3으로 표현한 것도 위트가 넘친다. 패키지의 조이스틱도 사소 하지만 추억을 소환하는 요소다.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 센터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하나쯤 소장해도 좋을 것이다.



크리스토프 클라레 포커
크리스토프 클라레 포커

카드 게임이 시계 속으로


RJ의 시계들은 과거의 게임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실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기계식 시계 중에는 엄청난 컴플리케이션 기능으로 실제 게임을 구현하는 것들도 있다. 이 분야의 대가를 꼽는다면 단연 크리스토프 클라레(Christophe Claret)일 것이다. 1989년 율리스 나르덴의 미닛 리피터 & 자케마르 손목시계인 산 마르코(San Marco)를 제작하면서 유명해진 그는 같은 해 자신의 이름을 딴 독립 시계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0년 ‘21 블랙잭’이라는 독특한 타임피스를 선보였다.


이 시계는 카드 게임의 이미지만 따온 것이 아니라 실제 블랙잭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케이스 왼쪽 측면의 버튼을 조작하면 다이얼 밑에 있는 카드 휠이 빠르게 회전하고 딜러와 플레이어의 디스플레이 창에서 랜덤으로 멈춘다. 바로 아래위 버튼을 조작하면 디스플레이 창이 순차적으로 열려 카드와 승패를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단순화되었지만 게임을 즐기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사실 시계 애호가들에게는 게임을 작동시키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게임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될 것이다. 케이스 백에는 로터를 활용한 카지노 룰렛이 위치하며(행운의 숫자를 임의로 세팅할 수 있다), 케이스 오른쪽 측면 미니 쇼케이스에는 초소형 주사위까지 들어 있다. 그야말로 카지노의 축소판이다.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할 때 반드시 착용해야 할 시계 중 하나가 아닐까? 기계식 시계로 카드 게임을 구현한 21 블랙잭은 업계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고, 이후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바카라, 포커 시리즈를 연달아 출시하면서 이른바 ‘카지노 3부작’의 위업을 달성했다.



지라드-페리고 1945 빈티지 잭팟 투르비용지라드페리고
지라드-페리고 1945 빈티지 잭팟 투르비용


기계식 슬롯머신을 담은 그랑 컴플리케이션


카지노 게임이라면 슬롯머신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슬롯머신은 ‘기계식’이었으나 1964년 미국 볼리(Bally)사가 전자식 슬롯머신을 만들면서 기계식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기계식 레버를 전자식 버튼이 대체하면서 슬롯머신 특유의 ‘손맛’도 사라졌다. 지라드-페리고가 2007년 SIHH에서 선보인 ‘1945 빈티지 잭팟 투르비용’은 과거 기계식 슬롯머신의 작동 원리를 손목시계에 구현했다. 케이스 오른쪽 레버를 당기면 12시 방향에 있는 3개의 릴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레버가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각각의 릴이 하나씩 멈추는데, 그때마다 해머가 징을 쳐 맑은 소리를 낸다. 땡땡땡! 하나의 릴에는 5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3개의 릴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은 125개이며, 연속으로 3개의 기호가 나타날 확률은 25분의 1이다. 잭팟을 상징하는 것은 ‘종’ 모양이다. 최초의 슬롯머신 중 하나로 알려진 ‘자유의 종’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5 빈티지 컬렉션의 사각형 케이스는 아르 데코의 우아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슬롯머신의 실루엣을 드러낸다. 고풍스러운 미술 양식에 슬롯머신 디자인을 연결하는 것이 어색한 듯하지만, 따져보면 ‘자유의 종’이 아르 데코 양식보다 훨씬 먼저 등장했다. 역사성으로 치면 슬롯머신 쪽이 원조인 셈이다.


물론 유희적 재미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오트 오를로제리(haute horlogerie)도 충실히 담겨 있다. 지라드-페 리고는 기존 무브먼트에 기능을 추가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무브먼트를 설계했다. 투르비용 기능과 스트라이킹 기능을 하나의 시계에 결합한 것만으로도 그랑 컴플리케이션 요소를 충족하는데, 여기에 정교한 슬롯머신 작동 메커니즘까지 적용했다. 상단의 골드 소재 릴에는 5개 그림의 내부를 파낸 후 섬세하게 래커 처리했다. 정확성을 추구하는 스위스 기계식 시계가 슬롯머신 게임의 불확실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라드-페리고는 상반된 두 요소를 멋지게 결합했고, 유희적 시계의 새로운 잭팟을 터뜨렸다.



오틀랑스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
오틀랑스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


순수한 놀이의 세계에 빠져들다


카지노 게임은 경제적인 ‘이익’과 ‘운’에 의존한다. 그래서 일부 이론가는 이런 종류의 게임을 놀이에서 배제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놀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이익에 관계없이 사소한 일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놀이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시계가 있다. 바로 독립 워치메이커 오틀랑스의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Playground Labyrinth)’다. 스위스 라쇼드퐁에 본사를 둔 오틀랑스는 2004년부터 여러 독창적인 시계를 선보여왔다.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계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 시간을 표시해야 할 다이얼에는 대신 작은 미로가 놓 여 있다. 사용자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골드 소재의 작은 공을 움직여 골인 지점까지 모험을 떠날 수 있다.


시계 기능을 뺐다고 해서 시계 미학까지 삭제된 것은 아니다. 유광과 무광 마감이 혼재된 티타늄 케이스는 사각형을 기반으로 여러 단면을 지니고 있으며,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까지 자연스럽게 이어 진다. 미로는 18K 로즈 골드(01 모델) 또는 18K 화이트 골드(02 모델)로 제작 되며, 공은 플래티넘과 로즈 골드로 각각 대비된다. 미로의 바닥은 샌드 블라스트 기법으로, 벽은 새틴 브러시드 기법으로 마감처리했고, 벽 테두리에는 앵글라주 피니싱을 더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살기에는 꽤 고급스러운 미궁이다. 케이스 백을 통해 내부의 기계적인 구조도 엿볼 수 있다. 크라운을 돌리면 기계식 리프트가 작동해 골인 지점에 도착한 공을 출발 지점으로 옮겨준다.


브랜드에서 언급한 이 시계의 슬로건은 ‘쓸모없지만 완전히 필수적인 물건’이다. 인간에 게 놀이도 마찬가지다. 놀이는 금전적 보상이 없는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며, 쓸모없어 보이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가끔은 삶에 그런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 진정한 럭셔리가 아닐까? 손목 위 미로 게임은 바쁜 현대인에게 잠시 허락된 사치이자 순수한 놀이의 세계로 안내하는 미궁이다.



해밀턴 카키 필드 티타늄 파 크라이Ⓡ 6 리미티드 에디션
해밀턴 카키 필드 티타늄 파 크라이Ⓡ 6 리미티드 에디션


비디오게임과 기계식 시계의 만남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는 빠르게 결합되고 있다. 이제 가상현실, 증강현실, 메타버스 같은 용어가 낯설지 않다. 전통적인 시계 제조사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해밀턴은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자신들의 시계를 조연으로 등장시켰다. 2021년에는 그 대상을 비디오게임으로 확장했다(소위 메이저 제작사들의 최신 사양 ‘AAA게임’은 이제 블록버스터 영화에 근접했다). 유비소프트의 최신작 ‘파 크라이 6’에는 해밀턴 카키 필드 티타늄 오토매틱 시계가 게 임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주인공 다니 로하스가 게임 내 특정 미션을 수행하면서 보상으로 획득하는 시계다. ‘파 크라이 6’는 ‘야라’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독재자에 맞서는 혁명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다니는 혁명군에 들어가 주동자 후안 코르테즈를 만난다. 카키 필드 티타늄 오토매틱 워치는 후안이 게임 내 시간으로 1983년, 야라의 전 대통령을 구한 대가로 받은 것인데, 후안은 첫 임무에 성공한 다니에게 이 시계를 건네준다. 시계를 착용하면 전력 질주 시 전반적인 수비 능력을 높여준다. 게임에서 기능적으로 작동 하는 것은 물론 게임 속 역사와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다.


해밀턴 ‘파 크라이6’ 게임에 등장하는 카키 필드 티타늄

유비소프트는 기계식 시계의 덕목 중 하나인 ‘이야기’를 게임 세계에서도 완벽하게 구현했다. 그리고 해밀턴은 이 매력적인 시계를 현실에서도 착용할 수 있도록 제품화했다. 42mm 티타늄 케이스에 ‘파 크라이 6’를 드러내는 양식화된 6시 방향 인덱스, 그리고 게임 세계를 상징하는 레드 초침을 적용했다. 독재 정부에 맞서 끝없이 전투를 벌이는 게임 속에서 밀리터리 워치 ‘카키 필드’는 매우 적절한 아이템이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물로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태그호이어 커넥티트 슈퍼마리오 리미티드 에디션
태그호이어 커넥티트 슈퍼마리오 리미티드 에디션


스마트 워치, 마리오를 품다


2021년 여름, 태그호이어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가상과 현실을 연결했다. 해밀턴이 최신 비디오게임의 주인공 손목에 아날로그 기계식 시계를 채웠다면, 태그호이어는 최신 스마트 워치에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게임 영웅을 소환했다.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슈퍼마리오 리미티드 에디션’은 비디오게임의 거장 닌텐도와의 장기 협업을 기념하는 첫 결과물이다. 시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는 마리오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크라운과 스트랩의 클래스프에는 마리오의 ‘M’ 이니셜이 새겨져 있으며, 세라믹 베젤의 3·6·9시 방향 에는 각각 버섯, 파이프, 슈퍼스타 같은 게임 내 익숙한 아이콘들이 배치되어 있다. 곳곳에 사용된 레드 컬러는 마리오의 붉은색 모자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마리오를 테마로 제작한 전용 워치 페이스가 하드웨어의 특별함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단순히 마리오를 보여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스마트 워치 는 착용자가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마리오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상받도록 설계되었다. 미리 설정한 운동량 목표의 25·50·75·100%를 달성할 때마다 마리 오는 ‘버섯’을 먹고 커지고, ‘파이프’에서 튀어나오며, ‘슈퍼스타’를 얻어 무적이 된다. 100% 달성하면 깃대를 잡고 내려오는 마리오 고유의 ‘엔딩’도 잊지 않았다. 즉 소프트웨어 차원의 마리오 애니메이션과 하드웨어 차원의 베젤 아이콘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자연스러운 결합이며, 기계식 시계 브랜드와 스마트 워치 기술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만 나야 할지 힌트를 준다.



‘게임 & 워치’ 혹은 ‘게임=워치’


1980년 닌텐도는 ‘게임 & 워치’라는 기계를 출시했다. 현재 닌텐도 스위치의 뿌리가 되는 휴대용 전자 게임기다. 작은 수첩 사이즈의 기계에 흑백 액정 디스플레이가 부착되었고, 내장된 한 가지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이 기계에 ‘게임 & 워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 알람 시계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게임’이 메인이었고, ‘워치’는 부수적인 옵션에 불과했다. ‘게임 & 워치’와 ‘기계식 워치’는 전혀 다른 물건이지만 본질은 비슷하다. 오늘날 기계식 시계 역시 놀이가 메인이고, 시간 확인은 부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즉 ‘게임=워치’다. 누구든 게임에 빠져 있을 때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계 애호가라면 시계의 디자인과 디테일을 감상하다가 정작 필요한 시간 확인을 잊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놀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의 시간과 분리되어 진지하지 않은 무언가에 즐겁게 빠져드는 것. 게임을 담은 타임피스는 럭셔리 워치의 가치를 지탱하는 힘이 놀이에 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