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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와 가치의 혁명

A revolution in structures and ethos, MATERIALS

 


지난 20년 동안 시계 제작에 사용되는 소재의 종류는 거의 10배로 늘어났다. 때로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유래한 소재의 혁신이 케이스와 무브먼트는 물론, 스트랩과 다이얼 등 다양한 부품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워치메이킹에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면서, 소재는 그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현대 워치메이킹 업계의 변화에 크게 공헌했다.


금세기 첫 20년간 시계 산업, 특히 워치메이킹에 사용되는 소재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규모의 혁신이 일어났는데, 새로운 소재가 개발되었고, 시계 제작이라는 목적을 위해 변형되었다. 시계 브랜드들은 차별화된 성능과 무게, 고급스러운 특징 등 다양한 이유로 더 혁신적인 소재를 추구하고 있다. 오데마 피게, 리차드 밀, 위블로, IWC, 파네라이, 율리스 나르덴 같은 선구적인 브랜드들은 이러한 시도의 최전선에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접목하면서 혁신의 가치를 극대화한다.



카본 나노튜브


새 시대가 열리다


20세기 후반까지 기계식 시계 제작에 사용되는 소재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특정 부품에 사용되는 소재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케이스는 주로 스틸이나 골드로 제작되었고, 드물게 플래티넘 또는 조금씩 사용되기 시작한 티타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소재들의 외형은 기초적인 표면처리 기술로 변형할 수 있었다. 한편 무브먼트는 대부분 황동이나 스틸로 제작했고, 아주 드물게 합성 소재를 사용했다. 글라스는 투명한 플라스틱이나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던 구조는 새로운 공급원과 아

이디어의 등장으로 격변을 맞이했다. 항공 우주 공학, 의학, 미소 전자 공학, 자동차와 중공업 분야 전문가들과 연결되면서 시계는 과거의 고정관념을 벗어 던졌고, 곧 외관과 무브먼트 모두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더 가벼운 소재를 위한 탐색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인데, 티타늄, 알루미늄과 수많은 합성 소재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구자들은 카본, 미세 합금이나 테크니컬 세라믹이라고 부르는 소재의 충돌과 긁힘에 강한 구조적 특성을 이용해 PVD, DLC, 세라믹 가공 등 수많은 표면처리 공법을 개발 해냈다. 또 하이엔드업계에서는 차별화를 위해 탄탈룸, 팔라듐 등 희귀 금속에 주목했고, 세미-프레셔스 스톤 역시 다시 각광받게 되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실리콘을 새로운 용도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기술력이 제품의 가

치와 직결되게 된 것이다.



오데마 피게 카본 섬유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 알라크라이트 컨셉 CW1(2002)



모리스 라크로와 폰토스 S 익스트림 리미티드 에디션(2014)


메탈(metal)


트렌드에 불을 지핀 것은 티타늄이었다. 1980~1990년대 선구자들에 의해 도입된 적이 있었지만 티타늄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21세기부터다. 티타늄은 시계업계 외부에서 유래한 신소재가 어떻게 업계의 중

심에 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시계 부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와 기법 중 상당수가 스위스의 치과 산업에서 유래했는데, 티타늄 역시 가볍고 단단하며 인체에 자극을 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치과업계에서 흔히 이용되는 소재였다. 티타늄은 첨단 기술에 아주 적합한 소재로 드러났으며, 마그네슘이나 알루미늄, 지르코늄 등 다양한 금속과의 합금에도 적합했는데, 어떤 브랜드들은 아예 티타늄 합금을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잠재력 있는 합금의 바탕이 되었다. 이 브랜드들은 자사의 합금에 제니티움(Zenithium)이나 위블로니움(Hublonium) 같은 이름을 붙여 기술력을 과시했다. 한편 해리 윈스턴 같은 브랜드들은 합금에 잘륨(Zalium) 등 자체적 명칭을 부여해 기술력을 자랑했다. 가벼움과 단단함, 그리고 진회색 외형이 합금의 규모와 풍부함을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는데, 무대의 중심에는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알라크라이트 컨셉, 모리스 라크로와의 파워라이트, 리차드 밀이 항공 우주업계에서 들여온 알루식(AluSiC) 같은 가장 특이한 소재가 자리하게 되었다.



율리스 나르덴 실리시움 밸런스 휠


합성 소재(synthetics)


합성 플라스틱은 다양한 소재의 장점만 활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법이다. 테크니컬 플라스틱은 다양한 경도의 레진과 필러 소재를 혼합해 만든다. 피크(peek)는 잘 알려진 합성 플라스틱 중 하나인데, 카본 섬유로 강화되어 매우 튼튼한 소재로 범용성이 높아 수많은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다. 섬유를 원단으로 직조하면

굳기 전까지 모양을 잡을 수 있는 여러 장의 시트가 만들어진다. 레이싱의 세계에서도 이용되는 이 공정을 통해 일정한 모양의 케이스나 다이얼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카본의 주된 특징은 가볍고 비트는 힘에 강하다는 점인데, 아주 얇은 층을 다른 방향으로 켜켜이 쌓아 올리면 이 특성을 훨씬 강화하면 서도 새로운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리차드 밀은 요트 생산 기업인 노스 신 플라이 테크놀로지(North Thin Ply Technolory)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수백 개의 층을 하나의 바인더에 쌓아 올려 원료로 이용하는 NTPT™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소재는 플레이트나 브리지, 크라운 등으로 가공되며, 특히 장력, 충격, 긁힘에 강하고 자성이 없는 초경량 케이스를 만드는 데도 이용된다. 하지만 이런 신소재를 선호하는 것은 기술적 측면의 강점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는 각광받던 신소재였지만 오랫동안 외면받아온 브론즈는 빈티지 시계가 유행하면서 다시 시계 제작에 사용되었다. 브론즈가 공기 중에 산화되면서 독특한 파티나를 얻는다는 특징은 한때 소재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여겨졌으나, 파네라이 PAM 382 브론조에서는 셀링 포인트로 거듭났다.



파네라이 루미노르 마리나 카보테크(2020)



샤넬 J12 부품 제작 과정
샤넬 J12(2019)


다형성(polymorphous)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유행을 경험한 또 하나의 소재는 세라믹의 일종으로 지르코니아라고도 불리는 산화 지르코늄이다. IWC가 블랙 또는 화이트 세라믹으로 만든 다빈치 컬렉션을 선보이고, 라도가 1990년에 항공 우주업계에서 들여온 후 샤넬 J12를 통해 인기를 얻은 세라믹은 어느새 시계 제작의 모든 영역을 정복해나갔다. 지르코니아는 낮은 마찰력 덕분에 무브먼트에서 주얼 대신 사용되고, 로터 아래의 볼 베어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케이스, 크라운, 베젤, 케이스 백, 심지어 브레이슬릿에 이르기까지 장식적인 측면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라믹은 가볍고, 인체에 적합하고, 녹슬지 않고, 자성을 띠지 않으며, 착용감이 좋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라도는 세라믹을 거의 모든 색상으로 염색하는 데 성공했다. IWC의 매우 튼튼한 탄화붕소 소재와 같이, 고성능이 필요한 부품에도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경이로운 것은 세라믹과 티타늄, 알루미늄 합금과의 궁합이었다. 파네라이는 합금으로 부품을 제조한 후 세라믹으로 표면을 처리했는데, 가볍고 튼튼한 코어에 다양한 색상을 입힘으로써 표면처리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PVD에 필적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PVD는 단단하고 얇은 여러 겹의 막을 표면에 덧붙이는 기술인데, 원래는 절단 도구를 경화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PVD는 케이스에 적용되며 ‘블랙 워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곧 케이스뿐 아니라 무브먼트 등 거의 모든 곳에 적용되었다.




로저드뷔 엑스칼리버 콰토르(2013)

만능 칩(chips with everything)


소재의 혁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실리콘을 빼놓을 수 없다. 실리콘은 마이크로 프로세서 생산에 이용되는데, 이 분야에서 실리콘은 나노미터 크기의 형태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했다. 율리스 나르덴의 자회사인 시가텍은 클린 룸 생산 공정을 이용해 실리콘 부품을 생산한 첫 번째 업체인데, 이 공정에서는 부품을 설계하고, 여분의 소재를 용해해 제거함으로써 다양한 레벨의 형태로 구성된 부품을 제조한다. 실리콘은 자성을 띠지 않고, 가볍고 유연하며, 마찰력이 낮다. 산화 실리콘층으로 코팅하면 온도 변화에 관계없이 탄력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 유명한 CSEM(Swiss Center for Electronics and Microtechnology) 연구소에서 관련 특허를 가지고 있다. 이 특허에는 파텍필립, 롤렉스와 스와치 그룹이 기여했는데, 이를 통해 이들은 장인에 의해 직접 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기존 부품보다 우수한 성능을 뽐내는 스프링, 팔렛 포크와 이스케이프 휠 등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기술로 리가(LIGA)가 있는데, 니켈-인 합금을 이용해 매우 복잡한 구조를 띠는 부품까지 한 번에 3D 프린팅으로 생산할 수 있다.




위블로 사파이어

스톤(stones)


복잡한 공정과 더불어, 자연 소재 역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피아제가 1960년대의 유산을 재발견하기 전까지 하드 스톤 다이얼은 잊힌 존재였다. 오데마 피게와 자케드로도 오닉스, 청금석, 공작석, 호안석 등의 소재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스톤 장식을 활용하는 시계들도 자수정, 파라이바 투르말린, 가닛, 스피넬, 사파이어 등 더 다양한 색상의 스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사파이어 크리스털, 그중에서도 인조 사파이어 크리스털은 놀랍도록 다양한 크기와 색상을 갖추었다.



론진 레전드 다이버 워치(2019)

순수성(purity)


젬스톤 사파이어와 달리, 순수한 커런덤(corundum, 사파이어 크리스털의 과학적 명칭)은 완벽하게 투명하다. 커런덤은 1980년대부터 글라스에 이용되었는데, 이후에는 무브먼트를 과시하기 위한 창문 역할을 하는 케이스 백으로도 사용되었다. 커런덤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긁힘이 발생하지 않는다. 1990년대에는 알랭 실버스타인과 빈센트 칼라브레제가 커런덤을 이용해 몇 개의 완전히 투명한 케이스를 만든 바 있고, 오데마 피게와 크리스토프 클라렛도 플레이트와 브리지를 만들기 위해 커런덤을 이용한 적이 있다. 그

러나 이 사파이어 크리스털의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한 것은 리차드 밀의 RM056으로, 복잡하고 완전히 투명한 케이스와 그에 상응하는 높은 가격을 자랑한다. 그 이후로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 특히 색상이 들어간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는 세련미, 기술력과 럭셔리의 정점이 되었다. 무브먼트의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는 케이스로 활약하면서,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는 워치메이킹 역사상 가장 품격 있는 쇼케이스로 자리매김했다.



리차드 밀 RM 56-02 사파이어(2014)
위블로 빅뱅 옐로우 사파이어(2019)
튜더 매뉴팩처 칼리버 MT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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