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시계의 정의를 묻는 베르네롱
- 3시간 전
- 7분 분량
규범을 해체한 시계가 어떻게 동시대의 취향과 감각을 관통할 수 있을까. 실뱅 베르네롱은 시계의 정의를 다시 묻고 그 틀을 모든 영역으로 확장한다.


미라지 38mm 시에나
지름 38mm
케이스 18K 옐로 골드, 30m 방수
무브먼트 칼리버 233, 72시간의 파워 리저브
다이얼 18K 옐로 골드
기능 시, 분, 초
스트랩 바레니아 가죽
예술인가, 시계인가, 패션인가. 베르네롱의 시계를 처음 본 사람들은 모두 ‘지금껏 본 적 없는 시계’라는 말을 하지만, 정작 이 시계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동시에 입문자부터 저명한 컬렉터, 전문가, 아티스트, 패션 피플에 이르기까지 이 시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이들이 여느 브랜드보다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등 생전에 동시대의 인정을 받으며 성공과 명성을 거머쥔 예술가들이 있다. 관습을 깬 조형 언어로 대중을 예술로 끌어들여 사랑을 얻고, 후원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국제적 명성을 확립했다. 기존 제도권에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며 미술사적 영향력을 남긴 인물들이다. 당시 시계 시장에서 무모하게 여겨졌던 요소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업계에 강렬한 충격을 안긴 이가 바로 실뱅 베르네롱이다. 그는 첫 작품 ‘미라지’로 GPHG 2024 오대시티(Audacity) 부문에서 당당히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브랜드 창립 후 불과 2년 만에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실뱅은 ‘21세기 사람들이 착용할 수 있는 시계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제작자이자, 업계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창작자이면서 시장과 시대를 정확히 읽는 ‘성공형’ 아티스트로도 평가된다.
실뱅 베르네롱은 2022년 자신의 브랜드를 창립하기 전, 15년간 대형 브랜드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해왔다. BMW와 포르쉐 등 자동차 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이후 IWC를 거쳐 브라이틀링에 합류했다. 지난 5년간 브라이틀링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한 그는 최연소 최고 제품 책임자(CPO)에 오르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브라이틀링 CEO 조지 컨(Georges Kern)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브랜드 내 크리에이티브 역할을 일부 유지한 채 독립 브랜드를 출범시키는 이례적 행보를 보였다. CEO의 승인 아래 개인적인 독립 프로젝트를 병행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는 업계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다. 현재 실뱅 베르네롱은 스위스 뇌샤텔의 아틀리에에서 ‘규범을 해체한 오를로제리(Derestricted Horology)’라는 모토 아래, 매년 9월 새로운 도전작을 선보이고 있다.



미라지 38mm의 전 컬렉션은 현재 신규 주문 기준으로 2029년까지 모두 판매된 상태다.
미라지 38mm 프러시안 블루
지름 38mm
케이스 18K 화이트 골드, 30m 방수
무브먼트 칼리버 233, 72시간의 파워 리저브
다이얼 18K 화이트 골드
기능 시, 분, 초
스트랩 바레니아 가죽
베르네롱의 시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도전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매년 새로운 무브먼트를 선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신제품마다 전혀 다른 무브먼트를 개발하겠다는 신념을 고수해왔으며, 지금까지 공개한 세 가지 컬렉션 모두 각기 다른 구조와 혁신적 기술을 담고 있다. 두 번째는 골드 소재 무브먼트다. 모든 컬렉션의 메인 플레이트와 브리지는 18K 골드로 제작하며, 특히 ‘미라지’ 컬렉션은 현재 생산되는 골드 무브먼트 중에서도 가장 얇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세 번째는 시장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면서도 스스로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는 점이다. 그의 시계를 통해 현시대 컬렉터들이 원하는 바를 읽을 수 있으며, 자신이 어떤 창작적 실험에 도전하고자 하는지 또한 명확히 드러난다. 실뱅 베르네롱은 여전히 시계를 통해 전하고 싶은 자신만의 메시지가 많은 21세기형 크리에이터다.
실뱅 베르네롱이 생각하는 골드
각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소재가 있겠지만, 만약 골드를 선호한다면 이곳에 잘 찾아왔다. 가장 오래된 금 유물은 약 6500년 전, 동유럽 불가리아 바르나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금을 태양신의 살로 여겼다는 사실이 상형문자와 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이처럼 금은 수천 년 동안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가치를 인정받아온 소재다. 금은 변동성 높은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안정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영속적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피부 위에 착용되거나 금고에 보관되며,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살아 있는 유산 역할을 한다.
실뱅 베르네롱은 골드 소재를 치열하게 연구하는 디렉터다. 까르띠에 크래쉬가 등장했을 때만큼의 충격을 안겨준 ‘미라지 38mm’는 소용돌이치듯 유기적으로 뒤틀린 형상의 케이스와 무브먼트로 화제를 모았는데, 케이스부터 핸즈, 버클, 스프링 바, 무브먼트에 이르기까지 전 부품을 18K 골드로 제작했다는 점에서 업계를 뒤흔들었다. 그가 이처럼 골드 소재의 사용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이어질 <GMT KOREA> 4월호 ‘골드 소재’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파격을 설득하다
사실 브랜드를 창립하기 전 실뱅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담긴 종이 더미를 들고 다니며 주변인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언을 구했지만, 극구 만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유는 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었다. 베르네롱의 미라지처럼 비대칭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일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이를 골드로 만든다는 구상은 무브먼트 협력 제조사 르 세르클 데 오를로제(Le Cercle des Horlogers)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이제부터는 설득의 시간이었다. 골드는 전통적으로 무브먼트에 사용되어 온 소재지만, 특유의 부드러움 때문에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두께를 줄이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특성은 얇은 구조일수록 더욱 까다로운 난제로 작용한다. 더불어 골드 가공 시에는 CNC 장비를 철저히 세척해야 하며, 황동 잔여물이 남을 경우 품질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가공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소재를 전량 회수해 재활용해야 하므로 비용 역시 크게 증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손을 내민 인물들은 로낙 마드바니(Ronak Madhvani)와 아우로 몬타나리(필명 존 골드버거 John Goldberger) 같은 저명한 컬렉터들이었다. 그들의 지지 속에서 프로젝트는 다시 동력을 얻었고, 르 세르클 데 오를로제 역시 오랜 설득 끝에 이 대담한 시도에 동참했다. 그 결과 ‘미라지 38mm’는 베이스 플레이트와 브리지를 포함한 모든 부품을 18K 골드로 제작하면서도, 무브먼트 두께를 단 2.3mm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기어 트레인은 마찰을 고려해 황동으로, 와인딩 휠은 토크의 강도를 견디기 위해 스틸로 제작했으며, 밸런스 휠은 티타늄으로 완성했다. 여기에 4개의 골드 조정 웨이트를 더해 정밀한 미세 조정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수동 와인딩 방식으로 3Hz의 진동수와 약 7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컬렉터의 초이스
로낙 마드바니와 아우로 몬타나리는 2025년 11월 <GMT KOREA>와 진행한 ‘올해 내가 수집한 2개의 타임피스’ 인터뷰에서 실뱅 베르네롱의 미라지 컬렉션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먼저 아우로 몬타나리는 ‘미라지 38mm 프러시안 블루’를 선택하며, 실뱅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했다. 약 10개월 전 선주문해 기다렸으며, 2025년 8월에 구입한 이 시계에 대해 손목 위에서의 안정감은 물론, 항자성과 기술적 완성도에서도 타협이 없다고 평가했다. 로낙 마드바니는 ‘미라지 38mm 시에나’ 모델을 선택했다. 그는 2022년 런던에서 처음 이 시계를 접했고, 단순한 스케치와 시연용 프로토타입에 불과했음에도 한눈에 반했다고 회상했다. 대부분 빈티지로 구성된 자신의 컬렉션 속에서도 이 시계가 현대 작품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미라지 34mm
지름 30 × 34mm
케이스 18K 화이트 또는 옐로 골드, 30m 방수
무브먼트 자체 개발 수동 칼리버 215, 72시간의 파워 리저브
기능 시, 분, 초
다이얼 타이거 아이, 라피스 라줄리
스트랩 송아지 가죽
우리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
베르네롱은 매년 9월 새로운 작품과 무브먼트를 선보인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밀어붙이며 극한의 도전을 이어가는 제작자처럼 보인다. 미라지 컬렉션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무브먼트 설계에서 출발해 완성한 케이스 형태다. 미라지는 피보나치 수열을 기반으로 한 정교한 수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탄생한 디자인이다. 많은 시계가 황금 비율을 언급하는 데 그치는 것과 달리 이를 실제 형태로 치환해 독창적인 구조를 구현한다. 피보나치 수열은 0과 1에서 시작해 이전 두 수의 합으로 이어지며, 그 비율이 점차 황금비(약 1.618)에 수렴한다. 디자인은 착용성과 익숙함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원형 케이스에서 출발해 중심에 피보나치 나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이어 나선 위 특정 지점(c1, c2, c3)을 기반으로 부등변 삼각형을 형성하고, 지름 5, 8, 13의 원을 정의하며 케이스의 주요 구조를 구축한다. 여기에 접선과 추가 중심점(c4, c6)을 활용한 확장, 그리고 두 번째 피보나치 나선을 통한 스몰 세컨즈 위치 설정까지 더해지며 최종 형태는 명확한 수학적 규칙 속에서 완성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역전형 핸드 스택’이다. 일반적으로 분침이 상단에 위치하지만 이 시계에서는 시침이 분침 위에 놓인다. 시침이 더 짧다는 점을 활용해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베젤 가장자리 가까이 배치할 수 있고, 그 결과 케이스 두께를 효과적으로 줄였다. 이를 위해 모션 워크는 브리지 쪽으로 재배치했다. 통상적으로 캐논 피니언을 센터 휠 샤프트에 결합해 분침을 구동한 뒤 시침으로 이어지지만, ‘미라지 38mm’에서는 캐논 피니언이 시침 휠보다 먼저 위치하며 구조가 완전히 반전된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해법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고민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등장한 ‘미라지 34mm’는 세로 34mm, 가로 30mm, 두께 약 7mm 내외의 콤팩트한 드레스 워치로, 보다 다양한 환경에서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천연 스톤 다이얼을 다루며 까다로운 수공예 공정을 요구하는 제작 과정 역시 큰 기술적 도전이었지만, 두께가 단 2.15mm에 불과한 칼리버 215는 얇은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안정적인 성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과제로 작용했다. 케이스, 무브먼트, 다이얼이 하나의 구조처럼 맞물리는 환경에서 두께를 줄이는 일은 곧 내구성과 정밀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케이스 형태에 맞춰 새롭게 개발한 전용 칼리버는 72시간의 파워 리저브와 3.5Hz의 진동수를 확보했으며, 이처럼 얇고 작은 형태의 무브먼트에서 이 정도 성능을 구현하는 사례는 드물다.




꽁띠엠 안뉴엘 실버
지름 38mm
케이스 904L 스틸 보호층(15%)이 있는 Pt950 플래티넘 케이스(85%), 30m 방수
무브먼트 칼리버 595, 100시간의 파워 리저브
기능 시, 분, 스몰 세컨즈, 요일, 날짜, 월, 낮/밤 인디케이터
다이얼 18K 골드 베이스 플레이트, 실버
스트랩 바레니아 가죽
직관적인 애뉴얼 캘린더, 꽁띠엠 안뉴엘
그렇다면 ‘꽁띠엠 안뉴엘’은 어떨까. 최근 베르네롱은 기존 스타일과 대비되는 모델을 선보이며, 일상 속 예술적 오브제에서 정밀성을 추구하는 컴플리케이션 기술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컬렉션의 첫 번째 모델은 애뉴얼 캘린더로, 복잡한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사용할 때 흔히 겪는 설정과 유지의 어려움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자체 제작 칼리버 595는 ‘십자형 아키텍처(cross architecture)’라 명명한 구조를 채택했으며, 캘린더 기능과 시간 표시를 각각 담당하는 2개의 레귤레이터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시간(시, 분, 초)은 위에서 아래로, 날짜 정보는 좌에서 우로 읽도록 설계했으며, 다이얼은 래커 처리한 18K 골드 베이스 플레이트 위에 실버와 블랙 두 가지 버전으로 제공한다.
애뉴얼 캘린더는 퍼페추얼 캘린더보다 단순한 구조로 여겨지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불편함이 따른다. 대부분 별도의 도구로 푸셔를 눌러야 하는 조정 방식과 시계를 멈춘 뒤 다시 착용할 때마다 요일·날짜·월을 하나씩 맞춰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요구한다. 여기에 ‘데드 존’이라 불리는 시간대에는 조정 시 메커니즘이 손상될 위험이 있어 사용자는 시간대까지 신경 써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개선하고 보다 직관적이고 실용적인 캘린더 기능을 구현하고자 탄생시킨 것이 ‘꽁띠엠 안뉴엘’이다. 시간과 날짜는 일반 시계처럼 크라운으로 조정하며, 요일과 월은 케이스 밴드의 2개 푸셔로 설정한다. 기존 애뉴얼 캘린더가 평년에는 3일, 윤년에는 2일을 조정해야 하는 것과 달리 이 모델은 평년에만 조정이 필요하며, 윤년은 자동으로 반영한다. 무엇보다 ‘데드 존’이 없어 언제든 안전하게 조정할 수 있다. 특히 보호 장치를 장착해 설정 중 오류가 발생하면 날짜가 자동으로 다음 달 1일로 리셋된다. 칼리버 595는 두께 5.95mm에서 이름을 따온 수동 무브먼트로, 전통적 배치와는 전혀 다른 구조를 지닌다. 기어 트레인은 드러나지 않고 와인딩 트레인이 후면을 지배하는데, 이는 다이얼의 십자형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에너지 관리 역시 핵심 과제였다. 월말 자정에는 4개의 점핑과 레트로그레이드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에너지는 스네일 캠을 통해 각 표시 장치에 개별적으로 축적되고 점핑 순간 메인 스프링에서 직접 끌어오는 방식을 피한다. 2개의 배럴은 직렬로 연결해 10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9월, 새롭게 선보일 뉴 워치
메인 플레이트와 브리지는 모두 솔리드 18K 골드로 제작했다. 플레이트에는 은은한 프로스트 마감을, 배럴 브리지에는 제네바 스트라이프를 연상시키는 기요셰 패턴을 적용해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브리지 모서리는 수작업 앵글라주로 정교하게 다듬었고, 모든 스크루는 블랙 폴리싱 처리해 특정 각도에서만 빛을 반사하는 거울 같은 표면을 지닌다. 큰 배럴 주얼은 폴리싱 처리한 카운터싱크에 안착되어 세밀한 완성도를 더했다. 케이스에 사용한 플래티넘은 스크래치가 쉽게 발생하고, 마감 또한 까다로운 소재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모듈형 스틸 레이어를 더했으며, 베젤과 4개의 러그 스텝, 헌터 케이스 푸셔 등 총 6개의 주요 부품을 교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베르네롱은 오는 9월 새로운 컬렉션을 위해 또 다른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시계에 새겨진 베르네롱의 이름은 일생에서 후회 없는 선택과 확신을 증명하는 실뱅 베르네롱이라는 인물의 신념을 드러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