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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NGE & SOHNE 삭소니아 문페이즈

별 헤는 밤, 달과 함께 걷다

 

냉전시대의 아픔을 딛고 부활하다


독일 시계를 접하면 독일이라는 나라가 보인다. 튼튼하고, 정확하고, 기능적이다. 전통과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가운데,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잇는 미니 멀리즘도 엿보인다. 랑에 운트 죄네 역시 이러한 독일 시계의 기본 특성을 공유한다. 여기에 기계식 시계의 미학적 가치를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오늘날 소위 ‘빅5’ 자리에 올랐다. 부활한 지 불과 30여 년 만에 이룬 성과다. 랑에의 역사에는 냉전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다.

grand lange moon phase
그랜드 랑에 1 문페이즈

독일 드레스덴의 워치메이커 페르디난드 아돌프 랑에는 1845년 매뉴팩처를 설립하면서 작센주 워치메이킹 분야의 토대를 구축했다. 당시 랑에의 고급 회중시계는 전 세계 컬렉터들이 탐내는 제품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 정부에 회사를 몰수당하면서 랑에의 명맥은 끊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페르디난드 랑에의 증손자 발터 랑에가 브랜드 재건에 나섰다. 그리고 1994년 4개 모델을 출시하면서 랑에 운트 죄네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랑에 1이 핵심이었지만 공개된 나머지 모델 중에는 기본에 충실한 삭소니아(Saxonia)도 포함되었다.


삭소니아 컬렉션은 이름처럼 작센주(Saxony) 워치메이킹의 전통과 기술력을 상징한다. 비대칭 다이얼의 랑에 1,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의 자이트베르크와 달리 삭소니아는 고전적인 디자인으로, 범용성과 포용성이 높은 컬렉션이다. 실제로 논데이트 엔트리 모델부터 수동 크로노그래프인 다토그래프까지 여러 제품이 포진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2016년 출시된 삭소니아 문페이즈는 랑에의 상징적인 아웃사이즈 데이트(빅데이트) 기능에 문페이즈 기능을 결합한 스몰 컴플리케이션 워치다.



옛 오페라하우스에서 찾아낸 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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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버 오페라하우스 시계에서 영감받은 랑에 1

빅데이트는 랑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기능이다. 1994년 처음 공개된 4점의 시계 중 투르비용 모델을 제외한 3개 모델에는 모두 빅데이트가 적용되었다. 부활한 랑에는 스위스 시계와 차별화 된 독일 시계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으며, 그 힌트를 작센주 드레스덴에 위치한 옛 오페라하우스에서 찾았다. 1841년 개관한 챔버 오페라하우스에는 관람석 뒤쪽에 독특한 대형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2개의 숫자 디스플레이로 5분 단위의 시간을 표시하는데, 로마 숫자 I에서 XII로 시간을 표시하고 5에서 55까지 아라비아숫자로 분을 표시한 다. 랑에는 이 시계의 디스플레이에서 영감을 얻어 첫 시계인 랑에 1에 빅데이트를 적용했고, 이후 빅데이트는 브랜드 전체 컬렉션을 관통하는 디자인 코드가되었다.


랑에 1이 1시 방향에 비대칭 빅데이트 창이 위치한 것과 달리 삭소니아 문페이즈는 12시 방향 가운데 위치한다. 1일에서 9일까지는 왼쪽 창에 공백이 생겨 미묘하게 균형이 틀어지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것은 챔버 오페라 하우스 시계에 맞춘 설정이다. 날짜 조정을 위해 11시 방향에는 큼직한 사각형 푸시 버튼이 있다. 부드럽지만 분명한 감각으로 날짜창이 넘어가는데, 버튼으로 정교한 기계장치를 조작하는 느낌이 들어 꽤 짜릿하다. 숫자가 바뀔 때마다 ‘찰칵’거리는 소리도 귀를 즐겁게 한다. 큼직한 아날로그 숫자가 2개의 사각창에서 매일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시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착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 정보가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날짜 정보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빅데이트 디스플레이는 시계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시선이 닿는 곳으로, 빠르고 직관적으로 날짜를 확인할 수 있게 돕는다. 브랜드의 정체성, 미학, 기술력을 보여주는 메커니즘이지만 누군가에는 실용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작은 밤하늘에 852개의 별이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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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소니아 문페이즈 핑크 골드

다이얼 하단 서브 다이얼에는 문페이즈 디스플레이가 위치한다. 문페이즈는 시간과 시계의 역사가 우주에서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인 기능이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태양, 달, 별자리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태양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달의 움직임, 즉 음력에 주목했다. 문페이즈의 시작은 기원전 205년 무렵 고대 그리스에서 제작된 천문 계산기 안티키테라(Antikythera)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장치는 천문학적 사건을 예측하는 장치로, 달의 위상 변화를 표시할 수 있었다. 회중시계 시대에 문페이즈는 인기 있는 기능이었고, 손목시계 시대까지 이어졌다. 원래 문페이즈는 실용적 목적이 강했다. 달의 위치는 밀물과 썰물에 영향을 주며, 과거 뱃사람들은 그 시간대를 계산하기 위해 문페이즈를 활용했다. 조명 기술이 없던 시절 보름달이 뜨는 날을 알기 위해서도 문페이즈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가 그렇듯 오늘날 문페이즈는 심미적인 영역으로 넘어왔다. 대중화된 기능이지만 브랜드마다 달과 밤하늘의 분위기는 제각각이다. 무미건조한 밤하늘에 얇은 달이 프린팅된 문페이즈가 있는가 하면 화려한 밤하늘에 의인화된 문페이즈도 있다. 어떤 브랜드는 실제 달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놓기도 한다. 랑에가 올려다본 밤하늘과 문페이즈는 매우 서정적이다. 블루 컬러로 처리된 작은 밤하늘에는 852개의 별이 은하수처럼 흘러간다. 아플리케 기법으로 표현된 달은 케이스와 같은 컬러의 골드 재질이다. 문페이즈 디스크는 아워 휠과 연동되어 실제 달처럼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움직인다. 4시 방향의 스위치로 조정할 수 있는데, 오차는 122.6년 동안 단 하루에 불과하다.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면 적어도 122년 동안은 정확한 달의 형상 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니멀한 앞면, 고전적인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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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소니아 문페이즈 화이트 골드

케이스 지름은 40mm, 두께는 9.8mm로 드레스 워치로는 다소 두껍지만 기능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케이스 소재와 다이얼 컬러에 따라 4개의 베리에이션이 있는데, 블랙 다이얼에 화이트 골드 케이스가 가장 캐주얼한 조합이다. 케이스의 화려한 골드 재질과 달리 블랙 다이얼은 그레인드 마감으로 처리되어 외려 수수하다. 달을 베어낼 듯 날카로운 소드(sword) 핸즈와 심플한 바 인덱스는 삭소니아 특유의 미니멀한 분위기를 잘 살려준다. 독일 시계의 감성은 시계 앞면보다 뒷면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L086.5 오토매 틱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엔트리 모델에 사용하는 L086.1을 기반으로 빅데이트와 문페이즈 기능을 추가한 고전적인 스타일의 엔진이다. 자이트베르크나 다토그래프 무브먼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랑에 특유의 고급스러운 피니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메인 플레이트의 여백은 촘촘하게 페를라주 기법으로 채웠고, 톱 플레이트에는 제네바 스트라이프를 넣었다. 무브먼트의 4분의 3을 가리는 쓰리쿼터(3/4) 플레이트도 구현되었다. 다만 로터가 있어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밸런스 콕의 정교한 수공장식, 고전적인 스완 넥 레귤레이터와 스크루 방식의 밸런스 휠은 이 시계의 지향점이 과거의 랑에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미적으로도 훌륭하다. 랑에는 무브먼트 제작에 ‘저먼 실버’라는 소재를 사용한다. 구리에 니켈과 아연을 섞어서 만든 은백색 합금으로, 19세기 무렵 독일 화학자가 개발했다는 의미에서 ‘저먼 실버’라는 이름이 붙었다. 즉 소재 자체에서 독일 시계의 정체성을 드러내겠다는 것이며, 브라스에 로듐 도금을 한 것에 비해 깊은 색감과 차분한 광채가 일품이다.



달과 함께하는 산책

삭소니아 문페이즈는 아라비아숫자와 문페이즈 디스플레이로 한 달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다이얼 위아래의 문자(태양력)와 이미지(태음력)가 우주의 움직임처럼 조화롭다. 달은 수십억 년 동안 지구의 주위를 맴돌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문페이즈 워치를 착용한다는 것은 그 고독한 발걸음에 기꺼이 동행하는 일이다. 무수한 별이 빛나는 삭소니아 문페이즈와 함께라면 훨씬 운치있는 산책이 될 것이다. 이 계절,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이 문페이즈 창에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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