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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네라이 루미노르 블루 마레

지중해를 닮은 1993년의 파네라이

 
파네라이 루미노르 블루 마레
PAM01085



다이얼에 지중해를 담아내다


커다란 쿠션형 케이스, 잠금장치를 갖춘 크라운 가드, 단순한 다이얼. 파네라이의 독특한 디자인 코드는 어떤 제품이든 거의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 점에서 파네라이만큼 엔트리 모델의 가치가 높은 브랜드도 드물 것이다. 실제로 유니타스 무브먼트를 장착한 구형 엔트리 모델들은 아직도 중고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파네라이는 과거 이탈리아 해군에 납품하던 군용 시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시기의 디자인은 고급 컴플리케이션 모델보다 엔트리 모델에 더 잘 녹아 있다. 또 파네라이 애호가들은 대부분 스트랩 교체를 즐기는데, 다이얼 디자인이 단순할수록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따라서 파네라이의 엔트리 모델은 상위 모델로 가는 과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제품이 아니라 멀티 파네리스티를 양성하는 핵심 라인업이라고 할 수 있다.


루미노르 블루 마레(PAM01085)는 파네라이의 새로운 엔트리 모델이다. 블루 마레(blu mare)는 이탈리아어로 ‘푸른 바다’를 의미한다. 선레이 가공한 블루 다이얼에서 따온이름처럼 지중해의 푸른 바다가 연상된다. 외부 조명과 각도에 따라 색감 변화가 큰 편인데, 라이트 블루에서 다크 블루로 서서히 변하는 모습이 마치 얕은 바다에서 심해를 향해 점차 깊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다이얼을 덮은 전면 글라스는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정면에서 봤을 때는 일반 다이얼과 큰 차이가 없지만 측면에서 보면 다이얼이 크게 왜곡된다.


이 미묘한 왜곡 현상이 블루 다이얼과 어우러지면서 마치 시계 내부에 바닷물이 들어찬 듯한 느낌을 준다. 특정 각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꼭 실물로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 이 글라스는 과거 엔트리 모델에도 있었지만 이번 블루 다이얼과의 조합이 특히 환상적이다. 두께와 시인성을 유지하면서 돔 글라스 특유의 빈티지 감성을 구현한 것도 마음에 든다.


파네라이 루미노르 블루 마레
PAM00372



밀리터리 워치에서 럭셔리 워치로


블루 마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계를 1990년대로 되돌려야 한다. 군용 시계만 제작하던 파네라이는 1993년 대중을 위한 첫 모델을 공개했다. 원래 군용 파네라이 케이스는 지름이 대부분 47mm였다(인기 모델 PAM00372를 비롯해 현재 출시되는 47mm 모델들은 이 시기의 군용 파네라이 시계를 현대적으로 복각한 것이다). 파네라이는 민간 판매를 시작하면서 47mm이던 케이스 크기를 대중 취향에 맞게 44mm로 줄이고 측면 디자인을 단순화했는데, 이 쿠션형 케이스는 제품 디자이너의 이름을 따 ‘베타리니(Bettarini) 케이스’라고 불린다(블루 마레 역시 이 케이스를 적용했다).


파네라이는 1997년 방돔(Vendôme) 그룹(현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될 때까지 베타리니 케이스에 유니타스 6497 무브먼트를 장착해 로고(5218-201a), 마리나 밀리타레(5218-202a), 루미노르 마리나(5218-203a) 등 여러 시계를 선보였다. 방돔 그룹 인수 이전, 소위 ‘프리방돔’ 시대를 대표하는 모델들이다. 특히 1996년 실베스터 스탤론이 영화 <데이라잇>에서 5218-201a를 착용하면서 파네라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마침내 1997년 방돔 그룹에 인수되면서 고급 시계 브랜드로 거듭났다.


이후 파네라이는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라인업을 정비했다. 특히 PAM00000, 일명 ‘제로’라 불리는 루미노르 모델은 5218-201a의 정체성을 잇는 모델로, 오랜 시간 파네라이의 베스트셀링 모델로 군림했다. PAM00000은 2017년 PAM01000으로 변경되었고, 파네라이는 2018년 자사 무브먼트 P.6000을 적용하면서 엔트리 라인업을 재편했다. 사실 2017년 PAM01000으로 변경되면서 몇 가지 다운그레이드가 있었으나 최근엔 대부분 보완되었다. 72시간 파워 리저브를 갖춘 자사 무브먼트를 유지하면서 쿠키 다이얼, 스크루 방식의 스트랩 교체, 러버 스트랩 기본 제공 등 과거 제로 시절의 요소를 복원한 것. 블루 마레 역시 이 업그레이드의 수혜를 입은 모델이다. 게다가 기존 엔트리 모델과 차별화된 몇몇 요소가 구매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파네라이 루미노르 블루 마레
PAM00000


프리방돔 시대의 충실한 재현


블루 마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1990년대 프리방돔 시대의 폰트와 인덱스 배치를 재현했다는 것이다. 다이얼 상단에는 ‘LUMINOR PANERAI’ 인덱스를 2단으로 프린팅했고, 다이얼 하단에는 ‘OP’ 로고만 넣었다. PAM00000부터 최근 엔트리 모델까지는 상단에 ‘LUMINOR’, 하단에 ‘PANERAI’와 ‘OP’ 로고를 새겼으나, 블루 마레에는 5218-201a의 인덱스 배치를 그대로 적용했다. 참고로 위아래로 화살표가 그려진 ‘OP’ 로고는 파네라이가 과거 군용 잠수 및 항공 보조 장비를 생산했음을 상징한다. 아라비아숫자 폰트도 기존 폰트에 비해 폭이 좁아졌는데, 이 또한 프리방돔 시대의 폰트다. 사소한 변화지만 파네라이 애호가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만한 요소다. 로듐 도금 핸즈를 적용한 것도 눈에 띈다.


이는 블랙 다이얼의 PAM01084(초침이 있는 마리나 모델), PAM01086(초침이 없는 베이스 모델) 역시 공유하는 특징이다. 일부 한정판 모델을 제외하면 파네라이의 엔트리 모델에는 무광 블랙 핸즈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위 모델이나 한정판 모델에만 적용하는 로듐 도금 핸즈를 엔트리 모델에 적용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부분. 물론 보다 완벽한 복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일 수 있다. 특히 블랙 다이얼 모델은 핸즈를 제외하면 5218-201a에 거의 근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 마레만큼은 예외다. 아예 다이얼 컬러가 다를 뿐 아니라 반짝이는 핸즈가 블루 선레이 다이얼의 화려함과 잘 어울린다.


파네라이 루미노르 블루 마레
PAM01084


엔트리 모델의 미덕


동력원으로는 72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갖춘 P.6000 핸드 와인딩 무브먼트를 사용한다. 기존 유니타스 무브먼트를 대신해 2018년부터 파네라이 엔트리 모델에 적용하는 자사 무브먼트다. 수동 무브먼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과거 군용 시계의 헤리티지는 수동 모델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루미노르 모델은 독특한 크라운 가드와 잠금장치 덕분에 와인딩 과정도 그리 불편하지 않다. 작은 레버를 열고 와인딩하는 과정 자체가 마치 장난감 태엽을 감는 듯한 재미를 선사한다. 스트랩은 다이얼과 잘 어울리는 블루 소가죽 스트랩과 블루 러버 스트랩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사실 기본 스트랩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파네라이 시계를 구입한 이상 다양한 스트랩 교환은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교체 도구를 함께 제공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직접 간단하게 스트랩을 바꿀 수 있다.


파네라이는 모델별로 다양한 스트랩 교체 방식이 있는데, 블루 마레에 적용된 스크루 방식은 프리방돔 시절부터 이어온 파네라이 고유의 메커니즘이다.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고 스트랩을 교체하는 과정이 전문 수중 장비를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트랩 교체가 파네라이 유저들의 문화로 자리 잡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네라이의 러버 스트랩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출시한 블루 마레는 화이트 컬러의 러버 스트랩과 좋은 매칭을 보여준다. 블루 마레는 파네라이 엔트리 모델 최초로 블루 컬러 다이얼을 적용한 제품이자, 1990년대 프리방돔 시대의 디자인 요소를 재현한 점에서 구매 가치가 높다. 게다가 블루 컬러와 라이트 그린 쿠키 인덱스의 매치는 상위 모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다. 무엇보다 지중해를 닮은 블루 다이얼을 통해 파네라이라는 브랜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알려준다. 좋은 엔트리 모델의 미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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