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CH & CAR COLLABORATION
2000년대 중반은 시계와 자동차업계가 손잡고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접근을 모색해 협업의 전성기를 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페라리와 여러 시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와 애스턴 마틴, 파르미지아니와 부가티처럼 업계를 대표하는 브랜드 간의 협업을 포함해, 당시의 흐름을 타고 같은 대열에 합류한 브랜드도 적지 않았다. 정열적인 페라리 레드와 대비를 이루는 깊은 파란색을 브랜드 컬러로 내세운 이탈리아의 럭셔리카 브랜드 마세라티도 시계업계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페라리의 독보적인 인기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지만 오데마 피게와 불가리가 마세라티의 심벌인 삼지창을 다이얼에 새겼다.
2000년대의 절반을 향해 가던 2004년은 마세라티가 창립 90주년을 맞이한 해다. 오데마 피게는 마세라티의 긴 역사를 기념하는 모델을 발표했다. 타원형 케이스를 캐릭터로 내세운 밀레너리에 힘을 쏟던 오데마 피게는 마세라티 창립 90주년 기념 모델에 밀레너리를 투입했다. 타원형 케이스 속 라운드 다이얼 구성과 오버사이즈 비대칭 인덱스로 당시로는 제법 독특한 디자인이 눈에 띄는 밀레너리는 마세라티의 심벌과 다이얼의 여백을 이용한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를 담았다. 오버사이즈의 비대칭 아워 인덱스와 같은 패턴을 적용한 듀얼 타임과 날짜 인덱스는 속도감을 드러내며 자동차 협업의 결과물임을 알렸다.

마세라티 레이스카 베이스의 12기통 엔진 슈퍼카 MC 12

오데마 피게 밀레너리 MC 12
또 다른 마세라티 모델로는 밀레너리 MC 12를 발표했다. 레이스카를 베이스로 공도용으로 제작한 12기통 엔진의 슈퍼카 MC 12를 위한 모델이다. 마세라티 MC 12처럼 밀레너리 MC 12 역시 강력함을 품었다. 시계는 자동차처럼 강력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능적 요소가 제한적이라 디테일과 높은 수준의 무브먼트를 표현의 매개체로 삼았다. 오픈워크 다이얼에서는 대칭을 이루는 2개의 배럴과 그 표면에 오데마 피게, 마세라티의 이름을 양각했다. 카본으로 만든 30분 카운터는 그 사이에 배치해 대시보드 크로노그래프를 이미지화했다. 다이얼 측면엔 삼지창 심벌과 프런트 그릴을 연상시키는 오픈워크 가공으로 마세라티의 느낌을 냈다. 다이얼 6시 방향의 투르비용 브리지와 칼리버 2884의 브리지는 푸른색으로 물들여 누가 봐도 마세라티 그 자체였다.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

불가리 옥토 마세라티 그랑스포트 리미티드 에디션
오데마 피게의 바통을 이어받은 불가리는 옥토 시리즈로 마세라티를 담고자 했다. 옥토 라인업에서 점핑 아워와 레트로그레이드는 기본 메뉴와 같다. 옥토 마세라티 모노 레트로그레이드 그랑스포트는 이처럼 익숙한 기능을 수정해 마세라티의 느낌을 냈다. 이 모델의 다이얼은 흡사 RPM 게이지 같다. 다이얼 6시 방향부터 12시를 거쳐 1시 방향에 걸친 미닛 레트로그레이드 인덱스는 의도적으로 1/10에 해당하는 숫자를 배치하고, 3시 방향으로 점핑 아워 윈도를 이동시켰다. 스포츠성을 드러내는 홀 가공한 가죽과 블루 스티치 역시 마세라티를 떠올리게 하는 데 기여했다. 다만 옥토 마세라티 모노 레트로그레이드 그랑스포트를 제외한 다른 마세라티 에디션은 자동차의 디테일보다 마세라티의 브랜드 컬러를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듯했다. 불가리를 파랗게 물들인 이후 마세라티는 현재까지 새로운 파트너를 찾지 않고 있다(패션 워치에 라이선스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페라리의 라이벌인 람보르기니는 로저드뷔와 파트너십을 맺고 고객을 공유한다. 로저드뷔는 람보르기니의 우라칸, 아벤타도르 같은 이름을 시계의 모델명에 차용하고 람보르기니 고유의 디테일을 다이얼에 옮기는 작업을 통해 협업 중이다.

벤틀리 브라이틀링 크로노맷 모델에 영감을 준 벤테이가

브라이틀링 크로노맷 B01 42 벤틀리
브라이틀링은 영국 럭셔리카를 대표하는 벤틀리를 택했다. 일정한 계약 기간에 협업을 진행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브라이틀링은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 (Breitling fo Bentley)라는 일종의 서브 브랜드를 구축했다. 2002년부터 손을 잡고 만들기 시작한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는 벤틀리의 거대한 차체를 떠 올리게 하는 최소 45mm의 큰 지름이 특징인 케이스에 벤틀리 기어 노브의 섬세한 패턴을 가져온 베젤을 둘렀다. 이는 공통적인 특징이자 디테일로 기능은 자동차 협업에 걸맞은 크로노그래프 위주로 전개했다. 양방향 회전 베젤은 정교하게 프린트한 플린지의 눈금과 함께 회전한다. 즉 다이얼 바깥쪽의 눈금과 일치시키면 평균속도를 확인할 수 있는 타키미터 기능이지만 일반적인 타키미터와 달리 주행거리와 관계없이 평균속도를 잴 수 있다. 가변 타키미터(variable tachymeter)라 부르는 기능으로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만의 고유한 기능이었다.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는 독립적인 브랜드처럼 전개한 덕분에 협업과 달리 지속적이었고, 벤틀리의 라인업과 특징을 일관성 있게 살려냈다. 손목시계뿐 아니라 대시보드 클락으로도 등장했다. 그중 백미는 대시보드 투르비용으로 투르비용 시계를 차량에 귀속시키는 과감한 시도였다. 뮬리너(Mulliner) 투르비용으로 명명한 이것은 벤틀리의 비스포크 서비스 뮬리너를 통해 제공한다. 보통 쿼츠식으로 장착해 기술적 난점이 없는 타 브랜드의 대시보드 클락과 달리 기계식 시계라는 큰 차이점이 있다. 즉 태엽을 통한 동력 공급이 요구되어 뮬리너는 일종의 차량용 워치 와인더를 일체형으로 구성했다. 시계 몸체가 규칙적으로 회전하도록 되어 있어 기계식 투르비용을 달리는 차 안에서 감상할 수 있다. 새로운 오너십과 CEO 체제를 맞이한 이후 브라이틀링 포 벤틀리는 서브 브랜드로 운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브라이틀링의 라인업에 녹아들어 있다. 크로노맷, 프리미어 라인에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이나 그린 다이얼은 벤틀리 의 몫으로 배려하고 있다.

롤스로이스 코치빌드 보트 테일

보베 롤스로이스 코치빌드 모델 보트 테일과 협업해 완성한 보트 테일 타임피스
벤틀리와 더불어 전통 럭셔리카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롤스로이스는 최근에야 시계 브랜드와 손을 잡았다. 벤틀리 뮬리너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롤스로이스 코치빌드가 선보인 보트 테일의 대시보드 클락을 보베가 제작한 것이다. 보베는 하나의 시계를 회중 · 탁상 · 손목시계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아마데오 컨버터블 시스템(amadeo convertible system)을 도입하고 있다. 이것을 응용해 대시보드 클락으로 변신시켰다. 차량에 시계를 두고 내리기에는 너무나 고가이기 때문에 대시보드에 탈착 가능하다. 덕분에 회중·탁상·손목시계에 이어 네 번째 용도를 찾아낸 셈이다. 롤스로이스 코치빌드와 마찬가지로 보베는 수동 투르비용을 기반으로 비스포크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이얼의 컬러는 물론 소재와 패턴, 인그레이빙을 포함한 케이스의 장식 요소를 선택할 수 있어 시계 자체만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물론 대시보드 클락에서는 정점을 찍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IWC 샤프하우젠 메르세데스- 벤츠와 협업해 완성한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AMG 에디션
자동차를 말할 때 독일 브랜드를 빼놓을 수 없다. BMW는 기계식 시계로 구현할 수 있는 가독성, 극한의 내충격성과 내자성 같은 실용적 가치를 내세운 볼 워치와 짧은 기간 함께했다. 독일의 기능주의적 성향이 기능과 실용성에 집중한 볼 워치와 교집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BMW의 로고를 다이얼에 부착한 볼 워치를 몇 점 소개했고, 기계식 온도계 기능을 갖춘 모델이 기능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BMW와 더불어 양산형 럭셔리카 시장을 나눠 가지는 메르세데스-벤츠는 고성능 디비전인 AMG로 협업 대열에 서고 있다. IWC와 AMG는 제법 오랜 기간에 걸쳐 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주로 IWC 인제니어 라인으로 소개되었다. 인제니어의 개성적인 다이얼을 그대로 옮겨온 대시보드 클락은 메르세데스-벤츠의 AMG 모델에 부착된 바 있다. 최근 IWC가 발표한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AMG 에디션은 인제니어가 아닌 파일럿 라인에 속한다. 티타늄 케이스에 카본 다이얼을 올린 크로노그래프로 카본은 그간 IWC가 AMG 모델에 즐겨 사용한 소재다. 케이스와 다이얼 모두 경량이면서 견고한 소재로 AMG의 고성능 이미지를 보여주는 도구로 적절하다. 다만 AMG가 아닌 메르세데스-벤츠의 이름은 시계에서 귀한 편이다. 과거 태그호이어를 통해 고성능 스포츠카인 SLR을 위해 내놓은 몇 개의 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포르쉐 까레라 포르쉐 크로노그래프에 영감을 준 포르쉐 컬렉션

태그호이어 까레라 포르쉐 크로노그래프
까레라, 모나코, 과거의 라인업 이름으로 몬자(Monza),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같은 레이스와 직결한 네이밍으로 레이스 유전자를 드러냈던 태그호이어는 최근 독일의 스포츠카 브랜드 포르쉐와 손을 잡았다. 까레라라는 공통의 라인업명을 공유하는 두 브랜드는 레이스 DNA를 한데 모았다. 최근 발표한 태그호이어 까레라 포르쉐 크로노그래프 스페셜 에디션이 바로 그것이다. 2000년 중반부터 집약되어온 자동차 협업의 테크닉과 디테일을 하나의 시계에 투영했다. 자동차의 디테일을 시계로 옮기는 작업은 이제 상당히 고도화됐고, 이는 리차드 밀 RM40-01 스피드테일에서 한 층 더 진화된 면모를 드러낸다. 시계 케이스, 다이얼, 스트랩, 무브먼트의 로터 등 시계의 주요 디테일을 사용하는 데서 나아가, 글라스의 형태, 무브먼트의 형태나 디자인까지 철저하게 사용해 협업의 주체인 맥라렌의 하이퍼 GT카 스피드테일을 집요하게 묘사해냈다.
협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쇼파드와 과거의 크로노스위스는 자동차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빼놓으면 섭섭하다. 이들이 보여준 자동차를 향한 열정이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파드의 공동 대표 칼 프리드리히 슈펠레는 자동차 마니아로 잘 알려져 있다. 쇼파드의 스포츠 라인업에 해당하는 밀레밀리아는 1,000마일을 달리는 클래식 랠리로 쇼파드는 공식 스폰서이자 타임키퍼를 담당해오고 있다. 일찍이 밀레밀리아로 자동차 디테일 묘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고, 특히 러버 밴드에 타이어 트레드웨어를 정교하게 새긴 디테일은 많은 브랜드에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타이어 브랜드 피렐리와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 로저드뷔는 밀레밀리아가 없었다면 더욱 많은 아이디어를 시계에 적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지만, 과거 크로노스위스 라인업에는 빈티지 대시보드 클락을 온전히 재현한 모델을 올렸다. 손목에 착용할 수는 있지만 큰 용기를 내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시도하기 쉽지 않은 크기를 자랑했다. 거칠게 말하면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 하나와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수행하는 시계 2개를 나란히 철판 위에 올린 모양새다. 이 모델의 탄생에는 창업자 게르트 랑(Gerd Lang)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클래식 재규어 XK120을 사랑하고 클래식 랠리를 내달리던 그를 알고 있다면 당연한 시계였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운동성능과 승차감에 관여하는 서스펜션과 시계의 내충격 장치는 목적이 다소 유사한만큼 구조에서도 유사성을 드러낸다. 시계 내충격 장치 는 주로 밸런스 휠에 집중되지만, 보다 뛰어난 내충격성을 목적으로 설계된 시계도 있다. 포멕스(Formex)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계 브랜드지만, 서스펜션 구조를 즐겨 응용해 자동차의 디테일을 정교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의 신생 브랜드 엠더블류 앤 코(MW & Co.)는 애셋(Asset) 2.1의 러그를 아예 서스펜션 형태로 만들어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부가티의 새로운 파트너인 제 이콥 앤 코(Jacob & Co.)는 씨론(Chiron)의 이름을 넣은 부가티 씨론 투르 비용을 발표했다. 케이스를 씨론의 유선형 차체 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엔진의 실린더가 움직이는 기믹을 구현한 투르비용으로 최근 떠오르는 타깃 프로덕션다운 면모를 보였다. 내연기관의 엔진을 정교하고 실제적으로 묘사한 예는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과거 부가티의 파트너였던 파르미지아니가 선보였던 수직 연결 구조의 무브먼트는 자동차의 트랜스미션을 재현했다.
쇼파드 밀레밀리아, 오리스 TT 시리즈, 로저드뷔로 이어진 타이어의 실제적 재현, 수많은 자동차 협업 모델이 그려낸 계기반을 모두 모으면 1대의 자동차를 완성할 수 있을 정도다. 미도의 그릴 워치에서 시작한 자동차와의 협업이 그동안 엄청난 발전을 이뤄왔다는 증거다. 또 손목시계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대시 보드 클락의 영역에서 시계 브랜드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제 자동차는 기나긴 내연기관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전기차의 시대로 발을 내디뎠다. 지금까지 시계 브랜드가 자동차와 함께하며 완성한 기법과 디테일은 엔진, 트랜스미션의 종말과 더 이상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 첨단 전장으로 제어되는 전기차 시대에는 아날로그인 기계식 시계보다 스마트 워치가 맥락에 잘 어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서 역설적으로 아날로그를 재현하고자 함을 비춰볼 때, 대시보드 클락은 기계식이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미래에 시계, 자동차, 두 분야의 협업이 어떤식으로 흐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어떤 결과물이 나오든 지금처럼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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